항목 ID | GC40000063 |
---|---|
한자 | 美術館 -, 大邱-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주연 |
[정의]
대구광역시에서 예술세계를 꽃피운 화가들과 대표 미술관.
[개설]
대구에서 한 해에 배출되는 미술대학 전공자들은 1,000여 명에 이른다. 대구의 미술대학 전공자들은 어떤 미술관을 드나들며 어느 미술관에 작품을 내걸까. 수준 높은 미술 전시를 1,000원의 행복으로 가능케 한 대구미술관, ‘봉리단길’이라 불리며 문화거리를 선도하는 봉산문화회관, 매달 대구 미술 전시 매거진을 발행하는 대구문화예술회관, 청년공간 수창맨숀과 함께 청년미술을 키우고 있는 대구예술발전소, 대형 미술 전시를 이끄는 대구엑스코 등은 대구의 미술 전시가 전국적인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대구 미술관 투어]
[대구미술관]
전국의 시 단위 미술관과 나란히 놓고 볼 때 대구미술관은 늦깎이에 속한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삼덕동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지어진 대구미술관은 2011년 5월 개관하였다. 미술관 입구에서부터 보이는 ‘d am’이라는 글자는 ‘대구아트뮤지엄(Daegu Art Museum)’의 약자로 대구미술관의 CI로 쓰인다. 도심에서 약간 떨어져 있지만 대덕산을 배경으로 한 넓은 부지와 앞뒤 풍광 덕분에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이 즐겨 찾는 편이다. 대구미술관이 유명세를 탄 것은 2013년 ‘쿠사마 야요이전’으로 33만 명의 관람객이 찾아 10억 원의 입장수익을 올려 대중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얻었다고 평가받은 이후다. 쿠사마 야요이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트 문양을 스티커로 제작하여 관람객들이 스스로 원하는 곳에 붙이도록 함으로써 참여하는 미술로 각광받기도 하였다. 대구미술관은 이전 전시에서도 사과상자 구조물을 선보이기 위하여 SNS로 요청한 결과 수많은 시민들에게서 호을을 얻어 한 달 만에 8,000개의 사과 상자를 모으기도 했다.
‘간송특별전’으로 국보급 보물들을 한 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다는 소식에 지역 미술 애호가들이 줄을 이어 대구미술관은 또 한번 관람 열풍을 낳았다. 당초 2018년 6월 16일부터 9월 16일까지 석 달 동안 전시하기로 하였다가 뜨거운 반응에 추석 연휴까지 연장되는 등 대구광역시민들의 문화 감성을 충족하는 계기를 낳았다. 대구미술관은 자체 애플리케이션을 두어 미술관 곳곳에서 스마트한 방식으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며, 유모차 입장, 사진 촬영 허용 등 친숙한 미술관으로 시민들에게 다가와 있다. 미술관 입구에서부터 펼쳐지는 예술적인 조형물과 단정한 산책로는 쾌적한 힐링 공간에 접어들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의 시립미술관 건립이 타 시도에 비하여 늦어진 까닭에 오랜 세월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이 시립미술관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당동에 있는 대구문화예술회관은 대구의 대표적인 문화예술공간으로 지방 문화예술을 진흥하고 향토 문화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1990년 5월 개관하였다.13개의 전시실이 가동 중인 ‘전시관’을 비롯하여 대형작품 공연홀, 야외공연장 등을 보유하고 있다. 대구문화예술회관은 국악단, 무용단, 극단, 소년소녀합창단 등 4개 시립예술단체를 보유하고 있어 전방위적인 예술 운영기관이라 할 수 있다. 부지면적 총 6만 6100㎡에 전시관 면적이 1만 3636㎡에 달하여, 여느 시립미술관 못지 않은 규모를 자랑한다.
[대구예술발전소]
대구광역시 중구 수창동에 있는 대구예술발전소와 수창청춘맨숀은 노후한 공장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조성한 곳이다. 대구예술발전소는 대구의 1920년대에 지은 연초제조장 창고 건물을 재탄생시킨 것인데, 한국전쟁 직후에는 이재민 수용소로 쓰였으며 한국담배인삼공사 공장 시절에는 1,000명이 일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대구의 근현대를 함께 누려온 공간이나 1999년 담배 공장이 문을 닫음과 동시에 허름한 건물로 전락하였다. 2013년 대구예술발전소로 문을 연 이래로 젊은 감감을 지닌 예술가들과 시민들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바로 옆에 있는 수창청춘맨숀은 옛 연초제조창 직원들이 살았던 아파트를 리모델링한 것인데, 이름처럼 청년 작가들의 주된 예술 활동 공간이 되고 있다. 대구도시철도 3호선 달성공원역 1번 출구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나와 접근성도 좋으며, 무료로 개방되어 누구나 편히 관람할 수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공장건물 특유의 탁 트인 공간이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도 1층에서부터 이어지는 조형물을 감상할 수 있도록 개방감 있게 구성되어 있다. 설치회화, 조각, 뉴미디어 등의 다양한 장르별 예술 작품이 전시되어 딱딱한 갤러리가 아니라, 이름처럼 예술이 발전하는 놀이터의 느낌을 준다. 특히 대구예술발전소는 예술가들이 창작할 수 있는 활동 공간을 제공하고 있어 입주 작가들이 시민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청년 예술가에게는 창작 스튜디오에서 지낼 기회를 제공하고 창작 지원금도 지급하며, 다양하고 실험적인 예술 작품들을 대구광역시민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하여 창조의 샘이 되고 있다.
[봉산문화거리]
2004년 개관한 봉산문화회관을 검색하고 찾아가면 이내 들어설 수 있는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의 봉산문화거리는 봉산동 대구학원에서 봉산육거리에 걸쳐 뻗어 있다. 1980년대만 해도 몇 개의 화랑이 있던 길에 불과하였는데, 어느새 이름난 문화 예술거리가 되었다. 현재 다채로운 갤러리만 해도 20여 곳, 화방, 고미술품 판매점 등 미술 관련 업체들이 줄지어 있으며 예술의 거리답게 예쁘고 아기자기한 소품샵, 카페 등이 거리 좌우로 들어서 있어 데이트 코스로도 각광받고 있다. 걷기만 해도 예술 감각이 묻어나도록 갤러리마다 문을 열어젖힌 곳이 많아 거리낌 없이 드나들 수 있다. 연중 미술 전시회가 있어 다양한 연령대의 관람객이 끊이지 않으며 특히 해마다 시월이면 1993년부터 봉산미술제가 열려 더욱 활기를 띤다.
[대구엑스코]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의 종합유통단지 지역에 있는 대규모 전시문화공간 EXCO는 1997년 착공하여 2000년에 완공되어 2001년 개관하였다. 지방의 전시컨벤션센터로는 개관 1호이다. 전시 컨벤션 산업을 통한 지역경제의 활성화와 국제화를 위하여 마련된 공간이다. 2011년 확장으로 더욱 세련되고 넓어진 엑스코는 건축물 자체가 가진 매력으로도 랜드마크가 되고 있다. 곡면유리마감으로 된 골조 트러스가 인상적이며 지하 2층, 지상 5층으로 부지 4만 3014㎡, 건물 연면적 14만 5952㎡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해마다 대구 최대의 미술 축제인 대구아트페어 등이 열려 대규모 미술 전시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인성이 그린 대구]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상정은 시인 이상화의 형으로도 유명하지만 대구에 최초로 서양 미술 화법을 전한 것으로도 이름나 있다. 1917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이상정은 대구의 미술사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 후 이인성을 비롯하여 서동진, 박명조, 이쾌대, 정점식 등 훌륭한 화가들이 대구를 주요 배경으로 하여 활동하였다. 천재 화가 이인성은 1912년 대구 중구 남성로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학교에 오래 다니지 못하여 대구미술사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화가 서동진에게 수채화를 배우면서 그림에 두각을 나타낸다. 이인성의 이름 앞에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은 것은 불과 17세의 나이부터였는데, 소파 방정환 주최로 열린 세계아동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한 것이다. 당시 「촌락의 풍경」이라는 작품으로 이름을 알린 이인성은 이듬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차지한 것을 시작으로 6회 연속 특선에 오른다. 이인성의 뛰어난 미술 재능은 자연히 일본 유학으로 이어졌다. 이인성은 대구를 넘어서 조선이 아끼고 일본에서 명망 있는 화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주로 향토색 짙은 작품을 남겼는데 「해당화」, 「가을 어느 날」, 「경주의 산곡에서」가 대표적이다. 또한 「계산동성당」, 「건들바위」, 「대구 앞산」 등의 작품을 통하여 대구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여러 명작을 남긴 이인성은 당대에 이미 유명하여서 조선의 고갱이요 세잔으로 불렸다. 일제강점기 당시 운동에서는 마라토너 손기정, 춤에서는 무용수 최승희, 그림에서는 이인성이라 할 만큼 1930년대에 인기를 끌었다. 이인성양화연구소를 설립한 이인성은 직접 후진 양성에 나서게 되는데, 고향인 대구에 서양화를 보급하는 데에도 공이 컸다. 이인성은 평소 술을 즐기고 호방한 성격이었는데 이러한 성향이 죽음으로 연결될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한창 혼란스럽던 1950년 11월 늦은 밤, 술에 취하여 밤길을 걷다가 만난 경찰에게 호통을 치다가 그만 총살당한 것이다.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나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이인성은 불과 38년이라는 짧은 삶 속에서도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놓았다. 대구광역시에서는 이인성을 기리며 해마다 이인성미술상을 시상하며 새로운 화가를 선정하고 있다. 또한 대구 곳곳에서는 이인성의 그림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인성 특별전’이 종종 열리기 때문이다. 가령 2019년 11월~2020년 1월 대구미술관에서는 ‘이인성 특별전’이 열렸다. ‘화가의 고향, 대구’라는 타이틀로 약 20점의 작품을 선보여 「계산동성당」과 「팔공산」 등 대구를 주제로 한 작품들도 여럿 감상할 수 있었다. 「계산동성당」은 1930년 경 35.5×45㎝ 종이에 그려진 수채 작품으로 계산동성당이 햇빛을 받고 서 있는 모습을 담아내었다. 붉은 빛깔과 푸른색, 하얀색까지 뚜렷한 대비를 보이면서도 조화를 이루어 호평을 받는 작품이다. 특히 「계산동성당」에 등장하는 감나무는 유명세를 타 ‘이인성 나무’라고도 불린다. 대구에서 최초로 세워진 서양식 건물인 계산성당은 1902년 서울과 평양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양식의 성당으로, 이인성의 그림 덕분에 더욱 명성을 얻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에 빨간 벽돌로 지은 천주교 계산주교좌성당이 있고 그림 속 감나무 한 그루를 실제로 볼 수 있기 때문에 포토존으로도 인기다. 현재 이인성의 대표작들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관 리움 등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대구미술관에 기탁된 경우도 있다.
대구광역시 남구 이천동에는 25m, 높이 2.2m의 담장에 ‘이인성 벽화거리’가 조성되어 있는데 미군부대인 캠프헨리 일원에 새롭게 테마거리로 만들어졌다. 이인성의 대표작인 10점이 타일 벽화로 조성되었는데 오랫동안 개발이 지연되어 낙후된 장소였던 터라 인근 주민과 대구 시민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이쾌대와 대구]
장엄한 화풍으로 한국의 미켈란젤로라 불리는 이쾌대 또한 대구 출신이다. 이쾌대가 태어난 곳에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현재 대구광역시 수성구에 해당하는 달성군 수성면이라는 첫번째 설과 경상북도 칠곡군 신리 39번지라는 설이다. 두 장소 모두 부잣집에 속하는데 만석꾼집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성장과정에서 이쾌대는 형의 영향을 크게 받는데, 열두 살 터울의 이여성(李如星)[본명은 명건(命鍵)]은 민속사에 식견이 깊었으며, 독립운동가 이상정과 함께 미술 활동도 하였다. 이여성은 대구에서 3·8 독립 만세 운동 후 혜성단을 조직하여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이때 약산 김원봉, 약수 김두전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다.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후에는 『약소민족운동의 전망』 등을 펴내며 학자, 평론가, 사회주의 운동가, 언론인, 화가 등으로 활동한다.
스승같은 존재인 형에게서 받은 감명으로 이쾌대는 휘문고보 미술교사 장발(張勃)[국무총리 장면의 동생으로 서울대 미대 초대 학장 역임]에게 그림을 배워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다. 그리고 1934년 도쿄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는데 결혼한 유갑봉과 함께 간 일본행이었다. 서양화를 그리면서도 동양적 색채와 선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은 이쾌대는 1939년 귀국하여 1941년 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였는데, 이중섭, 문학수 등이 신미술가협회에 속하였다. 해방 이후 이쾌대는 성북회화연구소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김창열과 전뢰진 등의 후학을 양성하는 계기가 된다.
어느 지역보다도 빨리 서양화가 도입되어 일찍 화단이 형성되면서 한국 근대미술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대구 미술에서 이쾌대는 「군상」, 「조난」, 「걸인」, 「상황」,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등의 작품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대구 미술의 지평을 끌어올린 이쾌대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이쾌대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되었다. 1953년 한국전쟁 이후 월북하였다는 이유에서다. 이쾌대의 이름 앞에는 항상 ‘월북작가’라는 명칭이 따라다녔으나 이념 투쟁보다는 생존 전략에 가까운 선택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거제포로수용소에서 아내에게 남긴 편지를 끝으로 이쾌대는 북한으로 가고, 아내인 유갑봉은 남편의 미술작품들을 벽장에 숨겨 보관하다가 1988년 월북 화가 해금 조치를 한 뒤에야 공개하였다. 어두운 시대를 극복하려는 열망의 서사를 작품에 그린 이쾌대의 작품 덕분에 대구의 근대 서양화는 더욱 전문화되어 갔다. 대구 출신의 지역 미술인 이쾌대가 내놓은 예술의 힘은 뒤늦게 호응을 얻으며 재조명되었기에 이쾌대에 대한 해석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