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0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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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10·1事件對策委員會 |
영어공식명칭 | 10·1 Incident Countermeasure Committe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46년 10월 대구광역시에서 발생한 10월항쟁을 수습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결성된 단체.
[개설]
10월항쟁은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민중들이 미군정의 탄압과 실정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선 사건이다.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시민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평화적 시위는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 시민, 학생이 합세하여 관공서를 습격하는 사태로 이어지며 점차 과격해졌다. 진압 방식도 무자비하여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으며 물적인 피해도 상당히 컸다.
[설립 목적]
대구 지역 정당·사회단체들은 1946년 대구에서 발생하여 전국으로 확대된 10월항쟁의 수습과 사후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10·1사건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0·1사건대책위원회는 광복 이후 처음이자 대규모로 발생한 민중 항쟁인 10월항쟁의 제반 대책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중 민생 문제 해결 방안이 가장 시급하였다. 10·1사건대책위원회는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약칭 미군정청]의 군정장관에게 10월항쟁의 사후 대책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건의서에는 첫째, 행정권을 이양할 것, 둘째, 미곡 수집령을 폐지할 것, 셋째, 농민의 수확물을 자유롭게 판매하도록 할 것, 넷째, 테러단을 해산시킬 것 등이 포함되었다.
이후 10·1사건대책위원회는 10월항쟁의 피해 상황 조사 활동에 착수하여, 1946년 10월 20일을 기준으로 하는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의 피해 상황을 ‘10·1사건 조사 통계표’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10·1사건 조사 통계표는 각 군별로 사망자, 부상자, 건물 전소, 건물 파괴 등 4가지로 구분하고 관청과 일반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10·1사건 조사 통계표에 따르면 사망자는 관리 63명, 일반인 73명이었고 부상자는 관리 133명, 일반 129명이었다. 건물 전소는 관청 4동, 일반 6동에 건물 파괴는 관청 240동, 일반 526동으로 집계되었다.
10·1사건대책위원회는 10·1사건 조사 통계표를 발표하면서 다섯 가지 단서를 달았다. 첫째, 계엄 하의 교통 금지와 조사 기관이 없는 관계로 누락된 것이 많을 것으로 사료된다. 둘째, 물자 피해액은 영천군만 10억 원 이상으로 판명됨에 따라 도내 피해액은 거대할 것이다. 셋째, 가구와 의복 등을 탈취하여 간 것은 1,000여 호이며 현재 곤란을 당하는 자 다수이다. 넷째, 경찰관 및 일반인의 행방불명은 수백 명으로 추산된다. 다섯째, 각 경찰관서의 무기를 다수 도난당하였으므로 안심할 수 없다.
[의의와 평가]
10·1사건대책위원회는 10월항쟁의 피해 상황을 조사하여 대책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10월항쟁의 사후 대책이 대구·경상북도 지역뿐 아니라 전국적 차원에서 강구되는 데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