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0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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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영어공식명칭 | The Korean War |
이칭/별칭 | 육이오전쟁,한국전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대구에서 전개된 6·25전쟁.
[개설]
6·25전쟁(六·二五戰爭)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 정전(停戰) 및 정화(停火)에 관한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진행된 전쟁으로 우리 민족 최대의 역사적 사건이다. 6·25전쟁은 500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와 막대한 물적 피해를 낳은 전쟁이며, 유엔[UN]과 중국 공산군의 개입으로 세계 전쟁의 성격을 띤 전쟁이다.
선전포고 없이 북한군의 총공격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전쟁 개시 4일 만인 1950년 6월 28일 수도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되었고, 북한군은 계속 남진하였다. 그즈음 유엔은 북한의 군사행동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회원국에 참전을 권유하였다. 1950년 7월 5일 미군 1개 대대와 포병대가 참전함으로써 6·25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1950년 7월 9일 대구에 미8군 사령부가 설치되었고, 8월 1일 국군과 유엔군은 최후의 보루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낙동강 방어선은 경상남도 마산 서남쪽의 진동을 기점으로 하여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창녕군 남지읍을 거쳐,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왜관, 김천, 상주, 함창에서 예천, 안동, 영덕을 잇는 선으로 부산 교두보, 또는 미8군 사령관인 월튼 워커 장군이 선정하여 ‘워커라인(Walker Line)’이라고도 불렸다. 낙동강 방어선을 놓고 1950년 8월과 9월, 두 달 동안 유엔군과 북한군은 전쟁의 승패를 걸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대구와 대구 인근에서는 팔공산의 비정규전, 왜관 전투, 유학산 전투 등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대구와 6·25전쟁]
6·25전쟁 발발 이후 1950년 7월 14일에 육군본부가 대구로 이전하였고, 7월 16일 한국 정부는 대전을 거쳐 대구로 이동하였다. 대구 시내 각급 학교는 휴교에 들어갔고, 학교와 주요 시설은 유엔군과 한국군의 기관이나 군속 기관으로 사용되어 작전 수행을 위한 거점이 되었다. 대구에서는 총궐기를 호소하는 대회가 열렸다. 1950년 7월 7일 구국총연맹 위원장 조병옥이 대구역 광장에서 국난 타개를 위한 총궐기를 호소하였고, 7월 14일 계성학교[현 계성중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북한 규탄대회가 열렸다.
7월 27일에는 문화극장에서 소집된 제8회 임시국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국난 극복 호소가 있었다. 국군은 대구에 국군대구지구방어사령부를 설치하고, 대구 방어 작전을 위한 군경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 결과 대구 방위 계획을 성안하고, 국군을 주축으로 한 각 기관이 임무를 분담하여 방위에 완벽을 기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북한군은 군위 방면 팔공산까지 점령하였고, 북한군의 박격포탄 3발이 중구 태평로2가 판자촌에 떨어졌다.
대구가 위태로워지자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고, 대구에는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졌으나 곧 취소되었다. 대구역에는 많은 피난민이 유입되어 대구 시내 곳곳에 피난촌이 형성되었다. 거리에는 강제징집을 위한 가두 검문이 이루어졌고, 자원입대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학도호국단은 학도의용군을 편성하여 안강, 포항 등 동해안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여학생들은 육군병원에서 부상병 치료와 간호에 협력하였다. 일반 시민들은 전쟁 수행에 따르는 각종 근로 사업에 종사하였다.
1951년 7월부터 정전 본회담이 시작되자 대구에서는 1953년 7월 정전협정 조인(調印) 때까지 학생과 시민들이 휴전 반대 시위를 벌였다. 1953년 정전협정이 가조인된 상태에서 이승만 정부에 의한 반공포로 석방이 이루어졌다. 대구에서는 대구 인근 영천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가 석방되었고, 1953년 6월 22일 대구 국립극장에서 ‘애국 포로 석방 환영 시민대회’가 열렸다.
6·25전쟁 중에도 1952년 2월 대구에서는 달성에서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진행되어 원외 자유당계 배은희가 서상일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1952년 4월 대구시의원 선거, 5월 경북도의원 선거가 진행되었다. 1952년 대구에서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와 지방자치 선거에서 여당 및 친여 세력이 압승하였다.
6·25전쟁 중에 대구에서는 민간인 학살 사건[달성1구 광산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났다. 민간인 학살은 전쟁 발발 일주일 정도 지난 시점에서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기결수 및 미결수 중 사상범으로 간주된 사람들이 국가권력에 의하여 가창과 경산 등지에 대량 학살된 사건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1951년 7월 대구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관련 예산을 배임 횡령한 혐의로 국민방위군의 주요 간부 5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1951년 8월 13일 달성군 화원읍 야산에서 총살된 사건이다.
[의의 평가]
6·25전쟁 당시 대구는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는 비점령 지역으로 직접적인 전쟁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 중 발생한 민간인 학살, 학교의 군 시설 이용, 피난 도시, 양키 시장, 이념과 정치 성향 등과 관련하여 도시 전체에 전쟁의 풍광이 짙게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