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구락부[단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237
한자 大邱俱樂部[團體]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3년 7월 7일연표보기 - 대구구락부[단체] 결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4년 2월 16일 - 대구구락부[단체] 대구 만경관에서 도시문제대책연설대회와 대구부민대회 개최
해체 시기/일시 1926년연표보기 - 대구구락부[단체] 해체
최초 설립지 조양회관 - 대구광역시 동구 효동로2길 94[효목동 1214]지도보기
성격 사회운동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의 명망가들이 결성한 문화 단체.

[개설]

대구구락부(大邱俱樂部)는 ‘대구청년회를 계승한 문화운동의 중추 실행 기관’을 전망하며 대구의 명망가들이 중심이 되어 출범한 문화운동 단체였다. 대구구락부는 1923년 무렵 대구의 대중운동에서 문화운동의 중심체였던 대구청년회가 침체되고 노농(勞農) 운동을 앞세운 대구노동공제회가 발흥하는 상황에서 실력 양성 노선을 견지하며 문화운동을 이어 나갈 목적으로 결성하였다.

[설립 목적]

대구구락부는 ‘민중 복리의 증진을 위한 봉사 정신의 고조’를 목적으로 문화운동의 중추 기관이 되고자 설립하였다.

[변천]

1923년 7월 7일 결성된 대구구락부는 1926년 조양동우회로 계승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구락부는 1923년 7월 7일 대구 조양회관에서 대구의 명망가들이 중심이 되어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위원을 선정하였다. 선정된 위원은 서창규, 서병조, 이상악, 윤홍렬, 서철규, 이선호, 양대경, 서병원, 서상일, 백남채, 김의균, 장직상, 김재환, 한익동, 이상린, 정봉진, 박기돈 등이었다.

대구구락부는 1924년 2월 대구부[현 대구광역시]의 ‘대구 도시계획안’을 둘러싸고 논의가 심화되어 갈 때, 실행 위원 10명을 선정하여 결의안을 작성하고 실행 위원 중에서 교섭위원 5명을 선정하였다. 선정된 교섭위원 중 윤홍렬, 서병조, 정용기 등이 대구부윤을 방문하여 도시계획에 대한 결의안을 제시하고 대구역을 북쪽으로 옮기는 대구부의 대구도시계획 원안에 찬성 입장을 표명하였다. 또한 대구부가 ‘5개년 사업으로 진행할 시가 정리 및 하수도 개수 공사비’ 70만 원을 조선인 시가에 우선적으로 사용할 것과 도시계획 위원을 구성할 때 조선인과 일본인을 같은 비율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

대구구락부는 1924년 2월 16일 대구 만경관에서 ‘도시문제대책연설대회’를 개최할 것을 발의하였다. 대구구락부의 발의로 개최된 도시문제대책연설대회에는 남산정위원회와 일본인 원안파(原案派)도 참가하였다. 2월 16일 1,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만경관에서 개최된 도시문제대책연설대회에서는 서건호의 ‘우리의 요구’, 정운기의 ‘생의 각오’, 서상일의 ‘대구 도시문제 유래와 그 진상에 대한 오인의 견해’, 김의균의 ‘도시계획에 대하여 이해를 공평히 할 방침 여하’, 배두용의 ‘오인의 생활과 도시계획’, 이우진의 ‘철저한 각오를 촉진하노라’, 이민우의 ‘칠성정의 현장’, 한익동의 ‘나의 소감’ 등의 연설이 이어졌고 일본인들의 연설도 있었다.

1924년 4월 대구구락부는 대구에서 결성된 ‘간도 동흥중학 대구후원회’에 참가하였다. 대구구락부는 1924년 7월 대구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대규모 수해가 발생하자 수백 원의 동정금을 기부하고, 대구 지역 각 언론 및 사회단체가 공동으로 구성한 응급 구제단에 참여하였으며, 수해 이재민을 위하여 대구 지역 사회단체와 공동보조를 맞추며 수해 복구와 원호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대구구락부는 대구에서 사회운동이 고양되는 상황에서 1924년 하반기를 거치며 점차 침체되어 1926년 조양동우회로 계승되었다.

[의의와 평가]

대구구락부는 대구도시계획을 둘러싸고 민족 간의 갈등이 벌어졌을 때 조선인의 이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펼쳤고, 대구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대규모 수해가 발생하였을 때는 수해 복구 및 원호 활동에 앞장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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