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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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德馨 |
영어공식명칭 | Lee Deokhyung |
이칭/별칭 | 명보(明甫),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山人),문익(文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병호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문관.
[가계]
이덕형(李德馨)[1561~1613]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부사과 이수충(李守忠)이고, 할아버지는 이진경(李振慶)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이민성(李民聖)이고, 어머니는 현령 유예선(柳禮善)의 딸 문화유씨(文化柳氏)이다. 부인은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이며, 아들은 이여규(李如圭)·이여벽(李如璧)·이여황(李如璜)이다.
[활동 사항]
이덕형은 1561년(명종 16) 2월 12일 한성[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1580년(선조 13)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관원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박사(博士)·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91년 예조참판에 임명되고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덕형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길에 오른 선조(宣祖)를 호종하였고,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5년 경기·황해·평안·함경 4도의 체찰부사로 활약하며 국방과 전후 복구에 힘썼으며, 1597년 우의정에 올랐다. 명나라 총병 유정(劉綎)과 순천에서 이순신을 도와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대파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601년에는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 체찰사로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을 정비하였고, 특히 대구부의 전후 복구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덕형은 1602년 영의정이 되었으며, 1609년과 1612년에도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익사형난공신(翼社亨難功臣)에 녹훈되고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613년(광해 5) 9월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삭탈관직되었고, 10월 9일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덕형의 저술로는 『한음문고(漢陰文稿)』 4권 3책이 있다.
[묘소]
이덕형의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덕형은 1630년(인조 3) 복관(復官)되었고, 문익(文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669년(현종 10) 상주의 근암서원(近嵒書院), 1691년(숙종 17) 포천 용연서원(龍淵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