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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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正相 |
영어공식명칭 | Lee JungSa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911년 - 이정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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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60년 5월 - 이정상 사회대중당 대구시 을구 총무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11월 - 이정상 민족통일경북연맹 총무위원장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62년 1월 9일 - 이정상 징역 5년 선고 |
출생지 | 상대리 -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상대리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통일 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민족통일경북연맹 총무위원장 |
[정의]
대구에서 활동한 통일 운동가.
[개설]
이정상(李正相)[1911~?]은 1911년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상대리에서 태어났다. 4·19혁명 시기 대구에서 사회대중당과 경북민족통일연맹을 통하여 정당 활동과 자주적 남북통일, 이대악법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이정상은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 대구시 서구 원대동[현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에서 침술원(鍼術院)을 운영하였다. 4·19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 대구시당에 가입하여 을구 총무로 정당 활동을 벌였다가 1960년 10월 사회대중당을 탈당하였다. 1960년 11월 26일 경상북도시국대책위원회를 확대 개편한 민족통일경북연맹[경북민족통일연맹]에 가입하여 총무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민족통일경북연맹 결성대회’ 직후 열린 민족통일경북연맹 상임위원회에 참석하여 남북 서신 왕래의 자유, 경제적 교류, 문화교류 등 통일 이전 남북 교류의 필요성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문과 선전문을 채택하였다.
이정상은 1961년 2월 25일 민족통일경북연맹 상임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3·1운동 기념일에 달성공원에서 ‘3·1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평화통일 강연과 선전문 살포를 결의하였다. 또 각 단체와 기관을 대상으로 참여를 요청하는 초청장을 발송하였다. 1961년 3월 1일 달성공원에서 3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3·1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 남북교류, 평화통일 등이 제기되었다. 대회 후 참가자들과 함께 현수막과 차량을 앞세우고 달성공원을 나와 북성로와 중앙통을 거쳐 반월당까지 “통일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정상은 1961년 4월 5일 경북통일연맹 상임집행위원회의 사회를 맡았다. 이 자리에서 남북학생회담 지원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4월 7일 수성천 변에서 열린 이대악법반대규탄대회에 참석하였다. 5월 17일 만경관 빈터에서 민족통일경북연맹 주최의 남북학생회담 환영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 개최 결의에 참여하였다.
이정상은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한 뒤 경북민족통일연맹 사건으로 군사혁명재판소에 넘겨져 1962년 1월 9일에 열린 재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