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44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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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花巖書院 |
이칭/별칭 | 화암사,경선재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노곡로3길 16-5[노곡동 384-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충희 |
건립 시기/일시 | 1789년 - 화암서원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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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871년 - 화암서원 훼철 |
이전 시기/일시 | 1921년 - 경선재 건립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98년 - 화암서원 중건 |
현 소재지 | 화암서원 - 대구광역시 북구 노곡로3길 16-5[노곡동 384-1] |
원소재지 | 화암서원 - 대구광역시 달서구 장기동 |
성격 | 서원 |
양식 | 주심포 팔작지붕 양식 |
정면 칸수 | 4칸 |
측면 칸수 | 2칸 |
소유자 | 수원백씨 문중 |
관리자 | 수원백씨 대구종친회 |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노곡동에 있는 백인관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
[개설]
화암서원(花巖書院)은 고려 말 고려에 절의를 지킨 선정(禪亭) 백인관(白仁寬)[1341~1421]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서원이다. 백인관은 자는 사달(士達), 호는 선정(禪亭),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수원백씨 대구 노곡동 입향조이다.
백인관은 고려 말에 유학자였던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 등과 교유하였던 학자이다. 고려 말 나라가 문란해지자 부모를 모시고 본향(本鄕)인 수원으로 귀향하였다. 조선 개국 후 태종이 세 번이나 불렀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고 금오산으로 이주하였다가, 이후 다시 길지를 찾아 대구 노곡동에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위치]
화암서원은 대구광역시 북구 노곡동 384-1에 있다. 남쪽은 금호강에 접하고, 북쪽은 함지산에 둘러싸여 있다.
[변천]
화암서원은 백인관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화암사(華巖祠)에서 유래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후손들과 지역 유림들이 지금의 달서구 장기동에 화암서원을 창건하여 선정 백인관을 주향하였다.
화암서원은 80여 년을 존속하여 오다가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그 후 1921년에는 백인관이 대구에 입향하여 살았던 노곡동에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경선재(景禪齋)를 건립하였다. 후손들과 지역 유림이 경선재 자리에 다시 건물을 중건하고자 뜻을 모았다. 1997년에 후손들과 지역 유림이 경선재가 있던 자리에 화암서원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1998년에 완공함으로써 화암서원을 복원하였다. 1998년 중건된 이후 백인관의 6세손인 백문련(白文蓮)[1502~?]과 13세손 백용채(白龍采)[1735~?]를 추가 배향하였다.
[형태]
화암서원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주심포 팔작지붕 양식의 건물이다. 화암서원 경내의 건물로는 사당 건물인 숭의사(崇義祠)와 강당인 경선재(景禪齋)가 있고, 동재인 수덕재(修德齋), 서재인 박학재(博學齋), 내삼문인 진도문(進道門), 외삼문인 모송문(慕松門) 등이 있다.
[현황]
화암서원은 중건된 지 얼마 안 되어 건물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화암서원은 대구광역시 북구 노곡동에 있는 태충각(泰忠閣), 노원재(魯院齋), 영모재(永慕齋) 등 여러 재실과 더불어 역사 문화 체험 공간이나, 인근의 금호강과 함지산으로 이어지는 자연 체험 활동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