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3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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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狐林洞 由來碑 |
영어공식명칭 | Horim-dong Yuraebi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서구 호림동 13-1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신현정 |
건립 시기/일시 | 2004년 - 호림동 유래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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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성서아울렛공원 - 대구광역시 달서구 호림동 13-11 |
성격 | 마을 유래비 |
재질 | 석재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200㎝[너비]|97㎝[높이]|47㎝[두께]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호림동에 있는 마을 유래비.
[개설]
호림동 유래비는 2004년에 대구광역시 달서구 호림동에 세워진 유래비이다. 호림동은 마을 가운데에 숲이 홀로 우거져 있어 ‘홀림[-林]’으로 불리다가 마을이 풍수지리적으로 여우가 먹이를 찾는 형이니 ‘여우 호(狐)’, ‘수풀 림(林)’을 써서 ‘호림동’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호림동은 원래 대구부 서하면(西河面) 소속이었다. 1910년 대구부 성서면(城西面) 호림동에서 1914년 달성군 성서면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 1958년 대구시로 들어왔다가 1963년 다시 달성군이 되었고, 1981년 대구직할시 서구 호림동, 1988년 대구직할시 달서구 호림동, 1995년 대구광역시 달서구 호림동이 되었다.
[건립 경위]
1984년에서 2012년까지 5차에 걸쳐 성서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호림동을 비롯한 성서 일대는 과거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에서 공단과 관공서, 아파트 단지 중심의 신도시로 변화하였다. 성서 일대 마을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마을이 공단에 편입되는 등의 이유로 마을의 해체, 변화, 이주 등을 겪으면서, 옛 마을을 기리는 마음에서 마을 유래비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1992년 망정부락 유적비를 시작으로 신당동 유래비, 갈미 유허비, 선원마을 유래비, 사령봉 유래비 등 열 기 이상의 유래비가 세워졌다. 호림동 유래비 역시 이러한 과정에서 세워졌다.
[위치]
호림동 유래비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호림동 13-11 성서아울렛공원 내에 있다.
[형태]
호림동 유래비는 너비 200㎝, 높이 97㎝, 두께 47㎝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쪽에는 여우 석상이 놓여 있다.
[금석문]
狐林洞 由來碑 호림동 유래비
悠久한 歷史 속에 아늑한 보금자리 우리마을 狐林洞은 史的古地名이 世宗朝以來 達句伐 甘勿川面 홀림동이라고 일컬었다. 廣闊한 살미들 한복판 작은 숲속에 자리잡은 외딴마을 홀림동은 그 옛날 어느때인가 우리마을을 지나가던 過客의 風水地理說에 依하여 洞名이 호림동으로 바뀌었다 한다. 그 過客은 우리마을의 特異한 생김새에 關心을 갖고 周圍를 살펴본 후 마을사람들에게 우리마을에 대한 風水地理說을 해설하는 말은 즉 이 마을의 地形이 여우설이라 하며 여우가 숲속에서 넓은 들판을 내다보며 먹이를 찾는 형이며 여우는 원래 썩은 고기를 즐겨먹는 짐승이라 이 마을 여우머리되는 지점 앞에 우마가축공동묘지를 만들면 영원하게 풍요로운 부촌이 된다는 風水地理說에 따라 동민들은 마을 앞 여우머리 지점에 牛馬家畜共同墓地를 만들었고 동명까지 홀림동을 狐林洞이라 개명하였다 한다. 西紀一九一0年 韓日合邦 以後 達句伐이 達城郡으로, 甘勿川面이 城西面으로, 홀림동이 狐林洞으로 개칭되었으며 達城郡과 高靈郡을 경계로 해서 悠悠히 흐르는 洛東江과 琴湖江과의 兩江 合水地點에는 강물을 맞받아치게하며 늠름하게 우뚝 서 있는 九羅洞 烽火 덤을 앞에 두고 넓은 들 복판에 자리한 雅淡한 狐林洞은 내 고장 先塋에 祖上의 뼈를 묻고 傳統的인 美風良俗의 바탕위에 農本爲主로 子子孫孫 살아왔으며 二十餘 各姓바지가 相扶相助하며 이웃四寸을 形成하였고, 穀倉地帶로서 豐饒롭고 살기 좋은 우리 마을은 內陸地方인 大邱와 港口都市인 釜山과의 洛東江 水路 通商交易이 盛行되면서 大邱地方의 豊富한 穀物과 釜山의 鹽 魚物을 交易通商 하는 一大關門이었다 한다. 우리마을 앞에는 俗稱 오그랑샘이란 우물이 있었는데 물맛이 짜서 食水로는 不可하였다. 옛날 이 우물가에 釜山서 온 소금의 荷置場이었기에 땅에 흐른 소금이 땅속깊이 스며들어 샘물이 짜다는 傳說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釜山서 큰 돗대를 세운 廣船(속칭:소금 배)이 한달에 몇 번이고 마을 앞에 到着하면 마을은 몇날며칠 大邱·釜山商人들이 門前成市를 이루었고 또 마을앞 兩江合水 넓은 白沙場은 嶺南地方의 名聲높은 씨름판으로 八道壯士들이 모여들어 一大盛況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리고 우리마을 앞 넓은 廣場에는 樹令 五百餘年의 悠久한 歷史를 자랑하듯 雄壯하게 서 있었는 두 그루의 노 고목은 보는 이로 하여금 史蹟의 考古思想에 젖어들게 하였으며 이 雄壯한 느티나무는 堂山 山神으로 모셨고 또 한 그루의 포구나무는 堂山天王神으로 모시면서 마을의 守護神이었다. 포구나무는 지금으로부터 五十五年前(一九四九年) 天壽를 다하고 老枯死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堂山天王神木으로 補充하기 위하여 葛山洞 後麓(뒷산기슭)에서 十五年生 가량의 회나무 幼木 한 그루를 구해 老枯死한 자리에 심어 天王神木으로 모셨다. 해마다 正月 대보름날이면 서낭당堂祭를 奉行하였고 또한 正月 初三日날이 되면 서낭당 堂山 天王님의 대내림을 하였다. 全 洞民이 參與하여 農樂으로 신나게 대내림을 해서 그 내림대가 가는 집이 그 해 서낭당祭 有司가 된다. 그 날부터 보름날 子正까지 全 洞民은 至極한 精誠으로 堂祭에 臨하는데 더욱이 十四日날 밤에는 參祭員 全員이 차가운 冷水로 沐浴齋戒하고 祭參하게 된다. 嚴肅하고도 精誠들여 마련한 珍羞盛饌으로 奉祭祀 告祝文에 비는 말인 즉 國泰民安 時和年豊 鄕堂家和 宜子宜孫 立身揚名 所願成就를 祝願한다. 우리 洞民은 堂山天王님의 守護아래 和氣致祥의 太平聖代로 살아왔건만 無常한 世上과 時代의 變遷으로 祖上代代로 살아오던 아늑하고 情든 고장은 都市化와 産業化의 물결에 밀려나 살던집 門前沃畓 痕迹없고 심지어 서낭당 마저 헐어졌다. 山神木 느티나무 亦是 나날이 變遷하는 世俗을 怨望하며 斷念하듯이 工團으로 밀려나는 마을과 때를 같이 하면서 一九九四年 四月 그해 봄엔 나뭇잎이 나질 않고 五百餘年의 生을 마감으로 老枯死하고 말았다. 堂山 天王神 회나무 亦是 옛 서낭당 자리에서 正西方向 八十미터 地點이 이 자리에 移植되었으며 그 옛날 至誠으로 信仰하다 뿔뿔이 흩어진 狐林洞民을 追想하듯 쓸쓸한 모습으로 홀로 서 있다.
嗚呼라 슬프고도 가엾어라
아늑하고 情든 고장이 자리에 있었던가 門前沃畓 보금자리 어디론가 痕迹없네 가슴속에 맺힌 怨恨 풀길이 없어 望九之年 八十六叟 雲谷 崔近郊는 全 洞民과 더불어 哀絶한 恨을 이 돌에 새겼노라
西紀二千四年月 日 書藝家 畫伯 慶州 崔近郊 謹撰 謹書
[현황]
호림동 유래비가 있는 성서아울렛공원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당산천왕 신목으로 모셔지는 회화나무도 함께 보존되어 있다. 이 회화나무는 1949년 원조 신목이었던 포구나무가 죽자 갈산동에서 새롭게 서낭당으로 옮겨 심었다가 마을이 급변하면서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의의와 평가]
호림동 유래비에는 일반적으로 유래비에 기록되는 지명 유래, 마을 역사, 비를 세운 이유 등뿐 아니라 짠맛이 나는 ‘오그랑샘’ 이야기, 금호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백사장에서 벌어진 씨름판 이야기, 서낭당 당제와 당산 산신 느티나무·당산 천왕신 포구나무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