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445 |
---|---|
한자 | 東村遊園地- 李仲燮 |
영어공식명칭 | Dongcheon Amusement Park and Lee Jung-seop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효동로6길 73[효목동 1315]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신현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6년 9월 16일 - 「동촌유원지」와 이중섭 이중섭 출생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3년 - 「동촌유원지」와 이중섭 이중섭, 미술 창작가 협회전 태양상 수상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5년 - 「동촌유원지」와 이중섭 이중섭 결혼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 「동촌유원지」와 이중섭 이중섭, 원산 신미술가협회 회장으로 선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12월 - 「동촌유원지」와 이중섭 이중섭 월남, 제주도를 거쳐 부산에 정착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5년 - 「동촌유원지」와 이중섭 이중섭 개인전 개최[대구 미 공보원]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6년 9월 6일 - 「동촌유원지」와 이중섭 이중섭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8년 - 「동촌유원지」와 이중섭 이중섭 건국 훈장 수여 |
동촌유원지 - 대구광역시 동구 효동로6길 73[효목동 1315]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에 있는 동촌유원지를 배경으로 그린 이중섭의 그림.
[개설]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에 있는 시민들의 휴식처 동촌유원지(東村遊園地)는 화가 이중섭(李仲燮)[1916~1956]이 남긴 대구를 배경으로 한 유일한 작품, 「동촌유원지」의 배경이기도 하다. 6·25전쟁 당시 많은 문인, 예술가들이 대구[대구광역시]로 피난하면서 자연스레 대구는 문화 예술의 거점도시가 되었고, 이중섭 역시 가족과 헤어져 대구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시기에 동촌유원지를 배경으로 두 사내가 만나는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1955년도 작으로 추정되는 「동촌유원지」는 경쾌한 수채화 물감으로 바탕을 칠하고 연필로 그린 다음 유화물감으로 채색한 것으로, 전쟁 후 동촌유원지에서 행락객들의 모습과 유난히 눈에 띄는 두 사람을 담고 있다.
[이중섭의 생애와 「동촌유원지」]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중섭의 궁핍한 생과 달리 이중섭의 집안은 대대로 농촌 명문의 지주집안이었다. 하지만 젊은 지주였던 아버지 이희주는 이중섭이 다섯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고 열두 살 위 형이 집안을 이어받았다. 이중섭은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 입학, 화가 임용련과 백남순 부부의 가르침 하에 그림에 두각을 나타내다가 졸업 후 일본 분카가쿠잉[文化學院] 미술과에서 수업 하던 중 운명의 여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를 만났다. 1945년 마사코는 이름을 남덕으로 바꾸고 원산에서 이중섭과 결혼했다.
해방 후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서자 원산 고향에서 형이 지주계급이란 이유로 죽임을 당하면서 집안은 몰락의 길에 들어섰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이중섭은 가족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하지만 당국의 종용으로 이후 제주도까지 가서 생을 이어가기도 했다. 이 시절 아이들과의 가난한 생활은 이중섭의 소중한 작업 소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의 일본인 신분과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가족을 일본으로 보내고 고통스러운 이별의 삶을 살게 되었다.
1955년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이 사상적 사전검열과 일부 은박지 그림들이 춘화로 왜곡되어 철거되는 등 시대의 압력과 왜곡된 이슈로 인해 개인전이 실패로 끝나자 이중섭은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로 갔다. 하지만 이중섭은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했던 대구에서 전시회 성과마저 흐지부지되자 실망과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고, 영양실조까지 겹쳐 몸과 마음이 극도로 쇠약해지자 주변인들에게 정신병자 취급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친구 시인 구상이 이중섭을 대구 성가병원 정신과에 입원시키기도 했다.
이중섭의 「동촌유원지」는 이러한 그의 암울한 대구시절과 관련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촌유원지」는 굵은 비가 떨어지는 풍경이 서글프지 않고 활기차며 시종 익살스럽고 정답다. 비가 내리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물놀이 중이며 좌측하단의 강아지는 즐거워 보인다. 유원지의 한 간이주점에서 금방 나온듯한 두 사내는 정답게 손을 잡고 있다. 한 사람은 이중섭으로, 군복 입은 이는 조카 이영진으로 추정된다. 이영진은 전쟁 때 자신이 데리고 피난한 조카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두 아들이 몹시 그리웠을 그에게 조카 영진은 자신의 아이들을 본 듯 반가웠을 것이다. 그림의 유쾌한 분위기는 지독한 외로움과 가족을 향한 그리움 그리고 가난 속에서 작업을 이어나가던 때 만난 피붙이 영진이 그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을지 짐작케 한다.
이러한 대구 시절을 말기로 1956년 9월 6일 이중섭은 간염과 극심한 영양실조로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홀로 숨을 거두었다. 삶의 궁극적 목표였을 만큼 함께 살고 싶었던 그의 아내 남덕은 그의 죽음을 지키지 못했다. 그의 주검은 무연고자로 사흘 동안 영안실에 방치되었다가 뒤늦게 친구들에 의해 장례가 치러졌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시대의 격변 속에서 경제적, 사회적 신분의 몰락을 겪으며,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림으로 그 모든 것을 뛰어넘으려 했던 비운의 화가는 살아서는 지독히도 궁핍했지만 죽어서는 결국 신화가 되었다. 이제는 소와 아이들로 대표되는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한국 미술사의 평가를 받고 있는 화가 이중섭이지만 살아서는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으며 오로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살고자 갈망하며 힘겨운 삶을 살다 짧은 생을 마감한 인간 이중섭이기도 했다.
[동촌유원지의 변화]
「동촌유원지」에서 사람들이 유유자적 뱃놀이를 즐기거나 물놀이를 하고 있는 강은 금호강이며 그 너머로 보이는 산은 팔공산으로 경치가 수려하다. 그림의 배경이 된 동촌유원지는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에 있다. 1920년대 일본인들에 의하여 개발되어 8·15광복 후 점차 유원지로 바뀌면서 시민들의 휴식처, 행락처가 되어왔다. 유원지의 북쪽에는 금호강이 흐르는데, 범람원에 의해 형성된 넓은 들이 분포하고 강변의 남안에는 침식작용으로 인한 수직의 절벽이 높이 솟아 절경을 이룬다. 이중섭의 「동촌유원지」에는 수직 절벽의 모습은 묘사되지 않았지만, 금호강과 모래사장은 잘 보여지며 둑 너머 팔공산 역시 그 시절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현재 전체면적 약 1.5㎢에 달하는 동촌유원지의 북동쪽은 강변 정비 사업에 의해 모두 개발되어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남서쪽은 금호강변의 제방을 따라 형성된 범람원과 야트막한 능선이 이어지는데, 주택·논·밭·유원지시설·식당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970년대까지 활기를 띠었던 동촌유원지는 금호강 오염으로 인하여 오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대구광역시청은 2001년부터 금호강 개선사업을 추진하여 폐수처리시설을 설치하고 주변 샛강 살리기 사업을 추진한 결과 금호강의 수질이 살아나고 오염으로 몸살을 앓았던 동촌유원지 일대 환경은 좋아졌다, 이어 대구광역시 동구는 동촌유원지의 옛 명성을 찾기 위해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를 정비하고 45년 만에 철거된 옛 구름다리를 대신하는 길이 222m, 폭 6m 규모로 케이블이 지탱하는 사장교(斜張橋) 형태의 해맞이다리 건설, 대구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조선전기 문신 서거정이 「대구십경」 중 첫 번째로 꼽았던 해맞이동산[구룡산]에 울창했던 옛 숲을 복원하는 등 자연적이고 아름다운 도시 경관을 제공하는가 하면, 2010~2015년에 걸쳐 생태하천 조성사업을 완공하는 등 동촌유원지의 활성화에 힘썼다.
이제 화가는 신화 속에 존재하지만 동촌유원지에는 지금도 그림 속 커다란 나무들이 건재하며 금호강 역시 유유히 흐르고 있고 둑 너머로 보이는 팔공산은 그대로 거기에 있다. 다만 이중섭의 그림 「동촌유원지」와 또 다른 시절 새로운 모습의 동촌유원지가 자연과 함께 숨 쉬며 추억을 남기는 공간으로 다시금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