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458 |
---|---|
한자 | 東區, 文學的 空間- |
영어공식명칭 | Dong-gu, it has created culture spac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석배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를 기반으로 해 만들어진 문학 작품들.
[개설]
대구광역시 동구에는 영산(靈山) 팔공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아름다운 금호강이 고요하게 흐르고 있어 빼어난 풍광이 한두 곳이 아니다.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은 그 승경을 감상하며 흥취를 시문으로 남겼다. 팔공산은 역사적 현장으로서도 중요한 곳이다. 예종이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벌인 동수전투[공산전투]와 관련하여 지은 「도이장시(悼二將詩)」와 「도이장가(悼二將歌)」의 현장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팔공산에 모여 회맹(會盟)할 때 회맹시를 지어 나라를 위한 충성을 다짐했던 곳이다. 한편 금호강에는 시인 묵객들이 뱃놀이를 즐기며 음풍농월(吟風弄月)[맑은 바람과 밝은 달 속에서 시를 지으며 즐김]하고, 소유정, 압로정, 아양루에서 아름다운 시문을 읊었다.
[팔공산, 문학의 산실이 되다]
927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팔공산에서 일전을 벌이다가 대패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신숭겸과 김락 두 장군이 목숨을 바쳐 구하였다. 그 후 왕건은 팔관회 때 짚으로 두 장군의 형상을 만들어 이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예종(睿宗)은 1120년 가을 서경에서 열린 팔관회에서 이 가상희를 보고 감명을 받고, 개경에 돌아와서 「도이장시」를 읊어 두 공신의 넋을 추모했다.
견이공신상(見二公臣像)[두 공신의 모습을 보니]/환란유소사(汍灡有所思)[생각에 잠겨 눈물 흐르네.]
공산종적막(公山蹤寂寞)[공산의 옛 자취는 쓸쓸한데]/평양사유유(平壤事留遺)[평양에는 그 일이 남아 있다네.]
충의명천고(忠義明千古)[충의는 천고에 밝게 빛나고]/사생유일시(死生惟一時)[생사는 오직 한 때의 일이라네.]
위군제백인(爲君躋白刃)[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종차보왕기(從此保王基)[이로부터 나라의 기틀 보전되었네.]
이어서 8구체 향가 형식으로 「도이장가」도 지어 두 공신의 큰 공을 잊지 않고자 했다. 김완진은 「도이장가」를 다음과 같이 해독·해석했다.
「김완진 해독」
주을완호백호심문(主乙完乎白乎心聞)[니믈 오ᄋᆞᆯ오ᄉᆞᆯᄫᅳᆫ ᄆᆞᅀᆞᄆᆞᆫ]/제천을급곤(際天乙及昆)[ᄀᆞᇫ하ᄂᆞᆯ 밋곤]/
혼시거사의(魂是去賜矣)[넉시 가샤ᄃᆡ]/중삼오사교(中三烏賜敎)[몸 셰오신 말ᄊᆞᆷ]/직마우욕망미아리자급피(職麻又欲望彌阿里刺及彼)[셕 맛도려 활 자바리 가ᄉᆡ와뎌]
가이공신량(可二功臣良)[됴타 두 功臣아]/구내직은(久乃直隱)[오래옷 고ᄃᆞᆫ]/적오은현호사정(跡烏隱現乎賜丁)[자최ᄂᆞᆫ 나토신뎌]
「김완진 해석」
님을 온전케 하온 /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
넋이 가셨으되 / 몸 세우시고 하신 말씀 / 직분 맡으려 활 잡는 이 마음 새로워지기를.
좋다, 두 공신이여. / 오래 오래 곧은 / 자최는 나타내신저.
팔공산은 임진왜란 때 대구지역의 유림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창의(倡義)하여 집결한 곳이고, 또한 승병들이 주둔하며 맹활약을 벌였던, 구국의 현장이기도 하다. 왜적들은 1592년(선조 25) 4월 13일 부산포를 급습하여 살인과 방화, 약탈을 자행하면서 동래성을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4월 21일에는 대구성이 함락되고, 대구부사 윤현은 4월 24에 관군을 이끌고 팔공산 동화사로 피신하고 말았다. 대구지역의 유림과 백성들도 팔공산으로 피난을 하여 왜적에 맞서기 위해 의병을 조직하였는데, 7월 6일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1530~1593]이 서사원, 이주, 채응홍, 서행원, 이상문, 은복흥, 손처눌, 채몽린, 전길, 정광천 등과 팔공산 부인사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1596년 3월 3일에 팔공산에서는 영남지역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70개 읍에서 모인 485명의 의병장들이 참여하여 제1차 공산회맹을 가졌다. 6개월 뒤 9월 28일에는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16개 읍 105명의 의병장이 참여한 제2차 공산회맹이 열렸는데, 김대성, 박충윤, 서재겸, 손처약, 채몽연, 채선수, 최동보, 최여호, 최인, 홍한 등 대구지역의 의병장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회맹시를 지어 의기(義氣)를 다졌는데, 서재겸의 시는 다음과 같다.
세난군우개보신(世難君憂豈保身)[난리에 임금께서 근심하는데 어찌 몸 보존하랴]/유감일사도이진(猶甘一死島夷塵)[왜적 물리친다면 기꺼이 죽으리]/
수장장사의천검(須將壯士倚天劍)[모름지기 장차 장사가 의천검을 잡고]/침소용유도파진(沈笑庸儒渡灞津)[용렬한 선비 껄껄 웃으며 파진을 건너네]/
백행여풍충가상(百行餘風忠可尙)[백행의 끼친 풍습이 충을 숭상하니]/삼한고국명유신(三韓故國命維新)[삼한의 옛 땅에 유신의 천명 있으리라]/
교남자차다생색(嶠南自此多生色)[영남 땅은 이로부터 많은 생색 날 것이니]/불독고명유후인(不獨高名遺後人)[고명한 이름 후세에 남길 뿐만 아니네]
서재겸은 난리에 임금께서 걱정이 많은데 어찌 내 한 몸 보존할 수 있으리라고 하면서 큰 칼을 잡고 전장에 나서는 늠름한 모습을 노래하며 의기를 북돋우었다. 의천검은 송옥(宋玉)의 「대언부(大言賦)」 중 “장검이 하늘 밖에서 번쩍인다(長劍耿耿倚天外)”에 나오는 것으로 ‘큰 칼’을 말한다.
최인(崔認)은 다음과 같이 서재겸의 시에 차운하여 의기를 드높였다.
장부당작사군신(丈夫當作死君身)[장부는 마땅히 임금을 위해 죽어야 하는데]/석갈의융락부진(釋褐衣戎樂赴陣)[갈옷 벗고 갑옷 입고 즐거이 군진으로 달려갔네.]/
수철녕용기하서(手鐵寧容機下鼠)[창검을 손에 드니 어찌 왜적을 용납하리]/혈釯장세도두진(血釯將洗渡頭津)[장차 피 묻은 칼날을 나루에서 씻으리라.]/
기감구역도이혼(期戡區域島夷魂)[기필코 이곳의 왜적을 평정하여]/서견산하물색신(庶見山河物色新)[산하의 물색이 새로워지는 것 볼 수 있으리라.]/
의사응지맹혈의(義士應知盟血意)[의사들은 응당 맹혈의 뜻 알 것이니]/동근시석제사인(同勤矢石濟斯人)[다 함께 부지런히 활과 돌로 싸워서 이 사람들을 구하세.]
이외에도 채선수, 최동보, 최여호, 손처약, 홍한, 박충윤, 이눌, 김응하, 박대무, 박연정, 김태허, 황경림, 김대성, 이응벽 등도 차운시를 남겨 결전을 앞두고 전의를 불태웠다.
팔공산은 산세가 우람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일찍부터 시인 묵객들이 팔공산을 멀리서 바라보거나 오르면서 읊은 시를 남겼다. 일찍이 사가(四佳) 서거정(徐巨正)[1420~1488]은 「대구십영」에서 팔공산과 관련된 승경을 「북벽향림(北壁香林)」과 「동사심승(桐寺尋僧)」, 「공령적설(公嶺積雪)」로 읊었다.
「북벽향림」[북쪽 절벽의 향기로운 숲]
고벽창삼옥삭장(古壁蒼杉玉槊長)[옛 절벽의 푸른 측백나무 대나무처럼 긴데]/장풍불단사시향(長風不斷四時香)[거센 바람 끊임없이 불어 사계절 향기롭네]/
은근경착재배력(慇懃更着栽培力)[정성스럽게 다시 힘을 쏟아 심고 가꾼다면]/류득청분공일향(留得淸芬共一鄕)[남아 있는 맑은 향기 온 고장에 퍼지리라]
「동사심승」
원상초제석경층(遠上招提石逕層)[멀리 절을 향해 돌층계를 오르는데]/청등백말우오등(靑藤白襪又烏藤)[푸른 등나무와 흰 버선에 또 검은 지팡이네.]/
차시유흥무인식(此時有興無人識)[지금 이 흥겨움을 아는 이 아무도 없고]/흥재청산불재승(興在靑山不在僧)[흥이야 청산에 있지 승려에 있지는 않네.]
「공령적설」
공산천장의릉층(公山千丈倚崚層)[천 길 팔공산은 험준한 봉우리 겹겹이고]/적설만공항해징(積雪漫空沆瀣澄)[쌓인 눈은 허공에 가득하여 이슬이 맑네.]/
지유신사령응재(知有神祠靈應在)[신사에 신령이 응당 있음 알리니]/년년삼백서풍등(年年三白瑞豐登)[해마다 서설 내려 풍년 들게 하시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했던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1553~1594]도 팔공산을 등산하고 「팔공산 유람 10수(遊八公山 十首)」를 남겼다. 정광천은 1575년에 아버지 정사철을 모시고 서형(徐浻)[1524~1575], 서사원(徐思遠)[1550~1615] 부자(父子), 주신언(朱愼言)[1539~?] 등과 함께 팔공산을 올랐다.
「숙파계사(宿把溪寺)」[파계사에 묵으며]
죽장천운경(竹杖穿雲徑)[대지팡이로 구름 뚫고 길을 오르니]/ 위봉용벽민(危峰聳碧旻)[가파른 봉우리 푸른 하늘에 솟아있네.]/
인간증입하(人間曾入夏)[인간 세상에는 이미 여름이 되었는데]/산정상유춘(山頂尙留春)[높은 산에는 오히려 봄기운이 남아있네.]/
우헐잔홍습(雨歇殘紅濕)[비 개이자 붉은 꽃엔 물기 촉촉하고]/풍경연녹신(風輕軟綠新)[가벼운 바람 부니 연녹색 잎이 신선하네.]/
송풍경속객(松風驚俗客)[솔바람은 속객을 놀라게 하고]/시복환성인(時復喚醒人)[때때로 사람들을 깨우치네.]
「숙삼성암이수(宿三聖庵 二首)」[삼성암에 묵으며] 총 2수 중 제2수
위봉직상박운청(危峯直上薄雲靑)[가파른 봉우리 바로 올라오니 엷은 구름 푸르고]/절승하수대은병(絶勝何殊大隱屛)[빼어난 경치는 어찌 대은병과 다르리.]/
야입소암산적적(夜入小庵山寂寂)[작은 암자에 밤이 드니 산은 고요하고]/효종성단몽초성(曉鍾聲斷夢初醒)[새벽 종소리는 새벽꿈을 깨우네.]/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1705~1786]도 「산중즉사(山中卽事)」에서 팔공산의 풍광을 읊었다.
「산중즉사(山中卽事)」[산중에서 읊다]
팔공산하일암웅(八公山下一庵雄)[팔공산 아래 한 암자 웅장한데]/화각규연상벽궁(畵閣巋然上碧穹)[단청누각 우뚝하게 푸른 하늘로 솟았네.]/
낙엽진퇴봉사척(落葉盡堆峯似瘠)[잎 떨어져 쌓이니 산봉우리는 야윈 듯하고]/현류쟁사학여농(懸流爭瀉壑如聾)[폭포수 다투어 쏟아지니 골짜기는 귀먹은 듯하네.]/
종교물외신맹정(從敎物外新盟定)[세상 밖에서 새로이 맹세하여]/각요진간구염공(却要塵間舊染空)[속세의 묻은 티끌 씻기를 바라네.]/
최시령구무한의(最是靈區無限意)[가장 신령스런 곳의 가없는 뜻은]/(數聲鳴鶴九天通)[몇 마디 학 울음소리 하늘로 통하네.]
[금호강, 백구(白鷗)와 벗하며 달에 취(醉)하다]
금호강은 경북 포항시 죽장면 상옥리의 가사령(佳士嶺)[500m]과 기북면의 성법령(省法嶺)[709m]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고현천, 신령천과 만난다. 그리고 경산시를 지나 대구의 동촌 부근에서 문암천(門巖川)과 합류하고, 다시 신천을 합한 뒤 대구광역시 달서구 파호동에서 낙동강 본류와 만난다. 강 주변의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나는 소리가 마치 거문고 소리와 같다는 뜻에서 ‘금(琴)’과, 넓은 강이 마치 잔잔한 호수와 같다는 뜻에서 ‘호(湖)’를 취하여 금호강이라고 했다.
대구 동구를 가로지르는 금호강은 경치가 빼어나서 일찍부터 시인 묵객들이 배를 띄워 선유(仙遊)를 즐겼으며, 강가에 정자를 짓고 음풍농월(吟風弄月)하였다. 일찍이 서거정은 「대구십영」을 읊으면서 제일 먼저 금호강의 절경을 노래했다.
「금호범주(琴湖泛舟)」[금호강에 뜬 배]
금호청천범란주(琴湖淸淺泛蘭舟)[금호강의 맑고 얕은 물에 조각배 띄우고]/취차한행근백구(取次閑行近白鷗)[한가로이 오가니 백구와 가까워지네. ]/
진취월명회도거(盡醉月明回棹去)[달빛에 한껏 취해 노 저어 돌아오니]/풍류불필오호유(風流不必五湖遊)[오호에 노니는 것만이 풍류가 아닐세.]
휘영청 달 밝은 밤에 금호강에 조각배를 띄우고 물결에 배를 맡겨 가니 어느덧 백구와 가까워진다. 백구를 벗하여 달빛에 흠뻑 취해 놀다 돌아오니 반드시 오호에 놀아야만 풍류를 즐긴다고 할 것이 아니로구나. 호기와 멋이 흘러넘친다. ‘난주(蘭舟)’는 결이 곱고 향기 좋은 목련 나무로 만든 조각배를 아름답게 이르는 말이다. 오호(五湖)에 노닌 것은 춘추시대 때 월나라 범려(范蠡)가 오나라를 멸하는 공을 이룬 뒤 서시(西施)와 함께 오호에 배를 띄워 떠나버렸다는 고사에서 온 것으로 흔히 신하가 공을 이룬 뒤에는 미련 없이 은퇴하는 것을 의미한다.
1561년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1529~1584]은 금호강변에 압로정(狎鷺亭)과 소유정(小有亭)을 지어 학문과 수신을 하는 한편 벗들과 어울려 음풍농월을 즐겼다. 채응린은 정자를 짓고 칠언절구 「소유정(小有亭)」에서 다음과 같이 물욕을 벗어나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읊었다.
「소유정(小有亭)」[소유정]
산변벽수산전수(山邊碧樹山前水)[산기슭엔 푸른 나무 있고 산 아래는 강물 흐르고 ]/수외청교수상가(水外靑郊水上家)[강 너머엔 푸른 들판이 있고 강 위에는 집이 있네. ]/
평수평산무외사(評水評山無外事)[산을 평하고 물을 평하니 세상사는 관심 밖이고 ]/생평지원고인과(生平只願故人過)[평생에 원하는 것은 옛 사람 만나는 것이네.]
압로정과 소유정은 1597년 정유재란 때 퇴각하던 왜적들이 방화하여 타버렸다. 소유정은 1609년 겨울에 채응린의 아들 채선길(蔡先吉)이 여러 아우와 더불어 중건하고, 압로정은 1655년에 채선길의 아들 채직(蔡樴)이 중건하여 유림들이 강학하고 교유하는 공간 역할을 하였다. 소유정에 대하여 지은 시는 차운시(次韻詩)가 대부분이고, 수창시(酬唱詩), 선유시(船遊詩) 등도 있다.
송담의 칠언절구 「소유정」을 차운하여 시를 남긴 이들은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효아옹(效亞翁) 송원기(宋遠器), 검간(黔澗) 조정(趙靖),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 등 수십 명에 이른다. 매화 철에 소유정을 찾은 손처눌은 다음과 같이 복사꽃과 오얏꽃이 피는 봄날 다시 찾을 것을 기약했다.
사속선인소유자(嗣續先人小有子)[후손이 선인의 소유정을 이어서 ]/중영강반가암가(重營江畔架巖家)[강가 바위 위에 다시 집을 지었네.]/
아래정치매화절(我來正値梅花節)[내 걸음한 때는 바야흐로 매화 피는 시절이라]/도리춘풍약재과(桃李春風約再過)[봄바람에 복사꽃 오얏꽃 필 때 다시 찾을 것 기약하네.]
오한(聱漢) 손기양(孫起陽)[1559~1617]은 1612년 무렵 소유정을 방문하여 「등압로정기 경차송탄시 족성사운(登狎鷺亭基 敬次松灘詩 足成四韻)」을 지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압로정 주변의 풍광을 읊었다.
「등압로정기 경차송탄시 족성사운(登狎鷺亭基 敬次松灘詩 足成四韻)」[압로정의 옛터에 올라 송탄 선생의 시에 공경히 차운하니 족히 4운을 이루었다]
강수유음처사가(講樹幽陰處士家)[강학하던 그윽한 나무는 처사의 집에 그늘 드리우고]/동남명덕기경과(東南明德幾經過)[동남의 명덕 있는 이들 그 얼마나 방문했던가.]/
연어완상천기숙(鳶魚翫象天璣熟)[연비어약(鳶飛魚躍)을 완미하니 천기가 충만한데]/구로심맹야취다(鷗鷺尋盟野趣多)[해오라기는 오락가락 자연의 정취가 물씬하네.]/
춘도방교신우헐(春到芳郊新雨歇)[봄이 오니 아름다운 들판에는 새 비 그치고 ]/운장열수화병라(雲粧列峀畵屛羅)[아름다운 구름은 산봉우리에 꽃 병풍처럼 둘러있네. ]/
석인거후유방촉(碩人去後遺芳躅)[큰 선비 떠난 후 향기로운 자취 남았는데 ]/독립사양부만사(獨立斜陽頫晩沙)[석양에 홀로 서서 모래 벌을 바라보네.]
앞에 있는 금호강에는 물새가 날고 물고기가 뛰놀며, 멀리 팔공산 산봉우리에 아름다운 구름이 꽃 병풍처럼 둘러있는 모습을 손에 잡힐 듯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압로정 주인으로 큰 선비였던 채응린을 추모하는 정을 나타내고 있다.
위의 손기양의 칠언율시도 여러 사람들이 차운하여 시를 남겼다. 곽재겸은 다음과 같이 「제채길중소유정(題蔡吉仲小有亭)」을 읊었다.
「제채길중소유정(題蔡吉仲小有亭)」[채선길이 소유정을 중건한 데 제하여]
간죽간매우간송(看竹看梅又看松)[대를 보고 매화 보고 또 솔을 보니 ]/주인심사가추궁(主人心事可推窮)[주인의 마음을 미루어 알 것 같네. ]/
위래불리공제봉(爲來不利空題鳳)[와서 도움 주지 못했는데 속절없이 제봉하며]/승흥간음입만풍(乘興間吟立晩風)[흥에 취해 읊조리며 저녁 바람에 서있네.]
텅 빈 소유정에서 주인을 기다리면서, 대나무·매화·소나무를 벗하며 안빈낙도하고 있는 채선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제봉(題鳳)’은 누구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를 뜻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여안(呂安)이 벗 혜강(嵆康)을 찾아갔으나 혜강은 집에 없고 그의 형 혜희(嵇喜)가 마중하자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에 봉(鳳) 자를 써 놓고 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이외에도 정수(鄭錘), 윤훤(尹暄), 임련(林堜), 류순(柳洵), 김지남(金止男) 등 수많은 문인과 고관들이 차운시를 남겼다.
동촌 금호강의 아양교 동쪽 구룡산 절벽 위에는 운치 있는 아양루(峨洋樓)가 있다. 1956년에 강봉희, 김영대, 이근직, 최준, 허흡, 이근직, 박봉희, 이원기 등 당시 지역의 명망가 72명이 뜻을 모아 세우고, 아양음사(峨洋吟社)를 결성해 시문을 즐겼다. 아양루란 이름은 백아절현(伯牙絶絃) 고사에서 따왔다. 춘추전국시대 때 진(晉)나라에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있었는데, 친구 종자기(鍾子期)만이 그의 음악을 제대로 알아주었다. 백아가 거문고로 높은 산을 표현하면 종자기는 “높고 높도다, 그 뜻은 태산처럼 높구나![아아호지재고산(峨峨乎志在高山)]”이라 하고, 큰 강을 나타내면 “넓고 넓도다, 그 뜻은 황하강 같구나![양양호지재유수(洋洋乎志在流水)]”라고 하며 장단을 맞추었다. 그런데 어느 날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자신의 음악을 알아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며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죽을 때까지 타지 않았다고 한다.
엄태두(嚴泰斗)는 「금호명월(琴湖明月)」[금호강의 밝은 달], 「슬수귀운(瑟峀歸雲)」[비슬산으로 돌아가는 구름], 「구룡초적(九龍樵笛)」[구룡산 나무꾼의 피리소리], 「팔공숙무(八公宿霧)」[팔공산의 짙은 안개], 「동촌석조(東村夕照)」[동촌의 저녁놀], 「서사신종(西寺晨鍾)」[서쪽 절의 새벽 종소리], 「쌍교채홍(雙橋彩虹)」[아양교와 철교에 걸린 무지개], 「창벽어주(蒼壁漁舟)」[푸른 절벽과 고깃배]로 아양팔경을 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