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0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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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代-, 元祖 玄風 -湯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현풍중앙로 56-1[하리 128-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창언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하리에서 3대에 걸쳐 70여 년 동안 지속해 온 현풍 곰탕의 원조 식당.
[개설]
현풍 곰탕은 해주 곰탕, 나주 곰탕과 함께 전국의 삼대 곰탕으로 알려져 있다. 현풍 곰탕의 원조집은 1940년대에 조그만 밥집에서 시작하여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와 중국, 미국 등의 해외에도 진출한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점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였다.
[유래]
곰탕은 예로부터 임금의 수라상에 오른 보양식으로, 국물이 진하며 공이 많이 들어가는 진귀한 음식으로 간주되어 왔다. 곰탕은 고기 국물을 쿵탕[『역어유해(譯語類解)』]으로 표기한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맹물에 고기를 넣어 끓이던 것을 뜻하는 공탕(空湯)[『몽어유해(蒙語類解)』]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뼈 조각을 넣어 국물을 우려내는 것을 가리키는 곤다라는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는 곰을 가차[假借]하여 고음(膏飮)이라 표기하였다. 곰탕은 우족, 소꼬리, 양을 주재료로 하여 재료와 국물의 빛깔에서 설렁탕과는 차이가 난다. 현풍 곰탕은 우족과 소꼬리와 소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위장만을 사용하며, 위장의 겉 융털을 완전히 제거하여 구수한 맛을 가미한다는 점에서 나주식이나 서울식 곰탕과는 구별된다.
[현풍 곰탕의 원조]
현풍 곰탕의 원조 식당으로 인식되는 원조 현풍 박소선 할매집 곰탕은 1940년대 현풍 지역에 있던 밥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낡은 초가집이던 이 밥집은 할매집, 일미 식당, 일미옥 등으로 불렸으며, 일반 식단과 함께 특별한 손님에게 곰탕을 제공하던 것에서 곰탕이 유래되었다. 이전부터 현풍 지역에서 주로 특별한 날에 장만하던 곰탕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간주된다.
일미 식당의 곰탕이 유명해진 것은 구마 고속 도로로 불렸던 중부 내륙 고속 국도를 건설하던 1970년대에 인부의 식사를 전담한 함바 식당으로 불리는 현장 식당을 맡고 나서부터이다. 당시 박소선의 아들 차준용의 제안으로 일반 식단과 함께 곰탕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현장 식당을 이용하던 고속 도로 건설 현장의 노동자들에 의해 현풍 곰탕의 맛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고속 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개통식 후 이 식당을 찾을 만큼 유명한 식당이 되었다. 고속 도로가 건설된 이후에는 경상남도 창녕군의 부곡 온천을 찾는 관광객들에 의해 현풍 곰탕의 인기가 더해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국 삼대 곰탕 중의 하나인 현풍 곰탕과 함께 박소선이 운영하던 식당이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그 당시부터 현풍 지역에는 물론 전국적으로 현풍 곰탕을 취급하는 수많은 식당이 개업하였다. 박소선의 외손자와 각별한 친분이 있던 사람이 박소선의 조리법을 전수한 외손자와 함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 한라산 곰탕이라는 식당을 개업하기도 하였다. 한라산 곰탕의 조리법은 박소선의 현풍 곰탕과 유사하나 재료는 제주도에서 사육한 소의 부위만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이처럼 박소선의 현풍 곰탕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조리]
육탕이라고도 하는 곰탕은 사골과 등뼈를 사용하여 육수를 내는 설렁탕과는 달리, 양지머리, 사태 등의 고기와 양, 곱창 등의 내장을 많이 넣고 끓인 탕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곰탕은 고기와 내장을 파, 마늘, 무와 함께 넣어 충분히 끓인 뒤 건더기를 건져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다진 파, 마늘, 참기름, 후춧가루, 간장 등으로 양념을 하여 국에 넣어 다시 끓여 내는 방식으로 조리한다.
현풍 곰탕도 주재료로 양지머리, 소꼬리, 우족, 양을 사용하고 부재료로 대파, 마늘, 물, 소금, 후춧가루 등을 사용하고 있다. 주재료인 소꼬리와 우족은 4~5㎝ 정도의 크기로 토막 내어 찬물에 담가 피를 뺀 후 씻어 둔다. 소의 내장 중 위장인 양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위만 끓는 물에 데친 후 융털 부분을 칼로 긁어내어 깨끗이 한다. 재료가 준비되면 솥에 소꼬리, 우족, 양을 넣고 푹 끓인다. 이후 양지머리를 넣어 끓이다가 거품과 기름을 걷어 낸 뒤, 대파와 마늘을 넣고 약한 불에 끓이면서 양지머리를 건져 썬 후 다시 끓인다.
원조 현풍 박소선 할매집 곰탕은 주로 암소의 부위를 사용하는 다른 지역과 달리 수컷 소의 부위인 우설, 우낭, 소머리 부위의 고기를 사용한다. 원조 현풍 박소선 할매집 곰탕의 2대째 대표인 차준용에 의하면, 곰탕은 구이와 달리 수소가 더 맛있다고 한다. 암소는 소꼬리가 가늘며 우족도 약할 뿐만 아니라, 위장도 엷어 깊은 육수를 낼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원조 현풍 박소선 할매집 곰탕에서는 육수를 우려내기 전에 솥에 참기름을 부어 소의 누린내를 제거하고 있다.
이상의 조리법에 따른 현풍 곰탕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다른 지역의 곰탕과는 차별화된다. 주재료를 수소의 우족, 소꼬리, 우낭 등을 고집함으로써 암소의 부위를 주재료로 하는 서울지역의 곰탕과는 다르다. 또한 고기뿐 아니라 소뼈를 파뿌리, 양파, 마늘과 함께 고아 육수를 만들고 사태와 양지머리는 별도로 삶아 결대로 찢어 놓는 나주식 곰탕과도 차별된 맛을 낸다.
[원조 논란]
전국 삼대 곰탕 중 하나인 현풍 곰탕이 197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면서 유사한 곰탕 식당이 전국 여러 곳에 개업하였다. 더욱이 합자 회사나 주식회사 형태로 박소선의 명의를 도용하여 현풍 곰탕의 지사를 모집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였다. 한때 현풍에서 유사한 곰탕집을 운영하다가 부산으로 이전한 식당이 자신이 원조라며 박소선의 대를 이은 식당을 상대로 소송을 걸기도 하였다. 이런 소송 과정을 거쳐 현재의 원조 현풍 박소선 할매집 곰탕이 현풍 곰탕의 원조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현황]
1940년대 초라한 초가에서 시작한 밥집이 이제는 전국에 지사를 둔 400여 석 규모의 전통 음식점으로 성장하였다. 초대 대표 격인 박소선이 1986년에 사망한 뒤, 아들 차준용이 2대 대표가 되었다. 차준용의 처인 안경순이 조리법을 전수받아 직접 곰탕을 끓여 왔다. 2007년에는 박소선의 손자인 차상헌이 대를 이어 3대째 이어 오고 있다. 현재는 차준용의 두 아들이 함께 가업을 잇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1994년에는 서울에 진출하였고, 2000년대 들어 미국과 중국 등 해외에도 사업을 확장하였다.
2015년에는 질 좋고 특색 있는 상품으로 골목 상권 활성화와 관광 상품화 가능성이 높은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업소 8곳을 스타 가게로 지정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곳으로 원조 현풍 박소선 할매집 곰탕이 지정되었다. 지정된 배경으로 원조 현풍 박소선 할매집 곰탕이 3대째 이어지는 전통적인 특화 상품으로서 인근의 비슬산 및 국립 대구 과학관 등과 연계하여 관광 산업에 기여할 것이라는 점이 작용하였다. 이와 동시에 달성군의 전통·향토 음식점으로도 선정되었다.
이처럼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원조 현풍 박소선 할매집 곰탕은 지역 사회의 발전과 장학 사업 등에 기여하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원조 현풍 박소선 할매집 곰탕은 인근 대구 테크노폴리스 일반 산업 단지와 연계되어 설립된 대구 경북 과학 기술원으로부터 장학 후원의 집 1호점으로 선정되어 우수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후원하고 있다. 2대 대표인 차준용은 현재 달성 문화원 원장을 비롯하여 대구광역시 달성군 지역에서 10여 개의 사회단체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대표직이 관련 단체나 지역 사회의 발전을 위해 후원해야 하는 자리이다. 이 같은 활동을 통해 식당 운영 수익의 일정 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