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3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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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達城郡] |
영어공식명칭 | Goryeo Dynas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고려시대 달성 지역의 역사.
[고려시대 달성 지역 행정 구역의 변천]
현재 대구광역시에 속하는 달성군의 행정 구역은 화원읍·논공읍·다사읍·옥포읍·현풍읍·유가읍등 6읍과 가창면·하빈면·구지면의 3개 면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고려시대에는 독립된 행정 구역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 시대에 달성 지역은 동경 유수관(東京留守官)의 속읍인 수성군(壽城郡)·해안현(解顔縣)과 밀성군의 속현인 현풍현(玄豊縣), 상주목 관내인 경산부(京山府)[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의 속현인 대구현(大丘縣)·하빈현(河濱縣)·화원현(花園縣)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고려시대의 경우 520여 개의 군현이 있었다. 지방관이 파견된 130여 개의 지역을 주읍이라고 하였고,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390여 개의 지역을 속읍이라고 하였다. 속읍은 주읍에 소속된 군현이라는 뜻으로 지방관이 파견된 130여 개의 주읍에 행정적으로 예속되어 있었다. 달성 지역의 수성군·해안현·현풍현·대구현·하빈현·화원현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읍이었다.
1143년(인종 21)에 대구현을 주읍으로 승격시켜 현령을 두었으며, 주읍인 대구현에는 하빈현과 화원현 등 2개의 속현이 있었다. 수성현(壽城縣)은 1390년(공양왕 2)에 감무(監務)를 두어 그로 하여금 해안현을 겸임하게 하였다. 1390년에 현풍현은 감무를 설치하여 밀양 소속 구지산 부곡(仇知山部曲)을 합속하였다.
[달성 지역의 호족과 토성]
후삼국 통합 전쟁을 수습한 고려 왕조는 940년(태조 23)에 군현을 단위로 토지와 민을 작성하였고,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일정한 지지와 협조글을 보낸 호족들을 공신으로 책정하였으며, 성씨를 부여하는 토성 분정(土姓分定)을 실시하였다. 달성 지역 역시 마찬가지로 토지와 민을 작성하였고, 지방 세력에게 성씨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본관제는 고려 초기 중앙 조정이 지방 세력에게 성씨와 본관을 주어 그들의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 주고, 지방 세력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해 줌과 동시에 이를 계기로 그들을 국가의 지배 질서에 편입시켜 지방 사회를 안정화하여 지역적·계층적인 통합력을 제고하고자 하는 장치였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증동국여지승람(增東國輿地勝覽)』 성씨조에 나오는 토성은 이들 지리지가 편찬될 당시까지 고려시대 이래 그 읍에 토착해 살고 있는 성씨로서, 그 고을 읍사를 구성하였던 향리들의 성씨였다. 달성 지역 6개 현의 고려시대 토성은 다음과 같다.
대구군 5개: 백(白), 하(夏), 배(裴), 서(徐), 이(李)
수성현 4개: 빈(賓), 나(羅), 조(曺), 혜(嵆)
하빈현 3개: 신(申), 이(李), 송(宋)
해안현 5개: 모(牟), 백(白), 하(河), 신(申), 정(丁)
화원현 5개: 서(徐), 갈(葛), 석(石), 조(曺), 정(丁)
현풍현 4개: 문(文), 임(林), 곽(郭), 윤(尹)
위 성씨들 가운데 토성들이 고려시대에 달성군 6개 읍에 살았을 것이다. 고려 시대의 경우 지방 세력에 해당하는 백성층이 성씨를 갖고 있었고, 일반민과 노비들은 성씨가 없고 본관만이 있었다. 그들은 본관에 적을 두고 다른 곳에 이주하더라도 본관이 있는 본읍에 매여 있었다.
[몽골의 침입과 달성]
1232년(고종 19) 몽골의 2차 침입으로 인해 팔공산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소실되었던 것에서 상징되듯이 달성 지역 6개의 읍들도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3차, 제5차 침입 때에도 경상도에 몽골군이 침입하였으므로 달성도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1256년(고종 43)에 현풍현 주민을 실은 배 40여 척이 몽골의 침략을 피해 낙동강 포구에 정박하자 몽골군이 이들을 쫓아 남녀와 재물을 포획하고 권농사 김종서를 죽였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낙동강에 붙어 있는 현풍현·화원현·하빈현은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