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3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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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達城郡] |
영어공식명칭 | Righteous Arm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한말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달성군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병.
[내용]
한말의 의병(義兵)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맞아 한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봉기한 민병(民兵)이었다. 민병이라고 해도 관군을 지원하는 등의 단순한 민병이나 관군의 위치를 초월한 민족의 군대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관군과 함께 또는 관군의 보조적 위치에서 작전을 수행한 조선 시대의 의병과 다른 점이다. 그러한 성격은 1904년부터 일어난 중기 의병 이후의 의병 전쟁에서 더욱 분명하게 부각되었다. 구한말 의병 항쟁을 의병 전쟁이라고 이름하는 것도 민족의 군대로서 항쟁했다는 데 이유가 있다.
[달성의 의병 운동]
달성군의 의병은 경상도의 수부인 대구에 접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직접 의병 진영이 형성되지는 않았다. 대신에 달성 출신 의병장이 다른 지방에서 의병 전쟁을 전개하는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달성 출신의 의병장이 많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달성[대구] 출신의 정경춘(鄭敬春)이 200여 명의 의병진과 함께 경상북도 북부의 봉화(奉化)와 영양(英陽)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정경춘에 대한 자료가 지나치게 소략하여 구체적인 의병 활동을 규명하기에는 제약이 있다.
다음으로 달성 출신으로 최초의 을미 의병을 전개한 문석봉(文錫鳳)을 들 수 있다. 문석봉 의병장은 1851년 경상북도 현풍군에서 아버지 하규(夏奎)와 경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882년 전라도 지역의 세곡을 조운선으로 서울까지 운반하는 조운리(漕運吏)가 되었다가 1893년 5월 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경복궁 5위장에 제수되었다. 그 해 12월에 진잠 현감에 제수되었다. 1894년 11월 공주부 양호 소모사(兩湖召募使)로 공주부에 근무하면서 동학 농민군을 진압한 뒤 다음 해 2월 공주부의 인사에 따라 공주부의 신영 영장이 되었다. 1895년 9월 18일 유성에서 명성 황후 살해 소식을 듣고 '천고에 없는 강상의 대변'이라고 통분하며, '국수보복'(國讐報復)의 기치를 내걸고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은 공주부 관아를 목표로 창의하였다. 회덕현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의병 부대에 필요한 무기를 확보한 뒤 진잠에 입성하고, 같은 해 10월 28일 공암을 지나 공주부로 나아갔다. 의병 부대는 공주 와야동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관군에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경상도 고령, 초계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하고 고령 현감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11월 24일 고령 현감의 고변으로 체포되어 대구부에 구금되었다.
[의의]
달성군의 의병 항쟁은 정경춘의 경상북도 북부 지역 의병 항쟁, 문석봉의 충청남도 공주 의병 항쟁 등으로 나타났으며, 시기적으로는 전기 의병에 속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에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