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6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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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仁興書院 所藏 古典籍 |
영어공식명칭 | The oriental old books in Inheungseowon |
이칭/별칭 | 인흥서원 고전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2길 26[본리리 73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은영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고도서, 책판 및 현판류 일체.
[개설]
인흥서원(仁興書院)은 1861년(철종 12) 10월 3일 팔도 유림과 노당(露堂) 추적(秋適)의 20세손인 추세문(秋世文)에 의해 개기(開基)하여, 1866년(고종 3) 9월 20일 창건되었다. 사당인 문현사(文顯祠)와 판목과 서적을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藏版閣)이 있으며, 서원 입구에는 추적의 신도비각 및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1871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훼철로 모든 건물이 헐리고 폐허가 되었다가 1938년에 복설되었다.
[구성/내용]
인흥서원에는 고서 117종 187책이 남아 있으며, 이외에도 책판 5종 143장, 현판 12점이 소장되어 있다. 고서는 19세기 필사본이 대부분이며, 그외 문집과 경전이 일부 있다. 책판은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된 명심보감판본 외에도 『추계 가승(秋溪家乘)』·『추계 가승 속편(秋溪家乘續編)』·『추계 가승 집록(秋溪家乘輯錄)』·『조군 영적지(竈君靈蹟誌)』 등이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다. 현판은 '인흥서원(仁興書院)'·'낙산요(樂山寮)'·'관수란(觀水欄)'등 총 12점이 있다. 이중 인흥서원 현판은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의 글씨이며, 좌의정 류후조(柳厚祚)가 쓴 「인흥서원 창건기」가 있다. 각 건물의 기문은 역암(櫟庵) 류치유(柳致游)가 썼으며, 상량문은 예조 판서였던 종산(鍾山) 이삼현(李參鉉)이, 신도비각 중건기는 후담(後潭) 채헌식(蔡憲植), 숭봉문 편액은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 낙산요 편액은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등이 썼다. 이들은 당대의 최고 서예가와 학자·관료들로서 인흥서원의 위상이 상당히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서삼경(四書三經)과 같은 기본 경전은 19세기 목판본으로 간행된 것 외에도 필사본이 많다. 서원 유생들의 기본 학습서인만큼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주목되는 것은 장서기(藏書記)를 보면 '태고정(太古亭)', '나계 추씨(羅溪秋氏)'와 같은 묵서가 있거나, '문헌지인(文憲之印)'과 같은 주인(朱印)이 찍힌 서적을 통해 후손과 인근 사족들의 서적 기증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추계 추씨는 중국 송나라에서 고려고종 때 귀화한 성씨로 알려져 있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황단 참반기(皇壇參班記)』,『황조 대책(皇朝大策)』,『황조인 본조 충신 자손록(皇朝人本朝忠臣子孫錄)』과 같은 중국 귀화인과 관련한 서적과 인흥서원에서 간행한 『추계 가승』이 전한다. 특이한 점은 『서유기(西遊記)』[목판본]와 같은 소설도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통문초철(通文草綴)』은 모두 3책으로 구성된 필사본이다. 인흥서원 건립 이래로 20세기 초까지 원내의 각종 역사(役事)뿐만 아니라 대구, 달성 지역 향촌 사회의 당대 현안을 확인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인흥서원의 교육 내용과 장서 수집 과정뿐만 아니라 인흥서원의 대외적 교류 범위 등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로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