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7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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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仲林 |
영어공식명칭 | Park Jungrim |
이칭/별칭 | 한석당(閑碩堂),문민공(文愍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수환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충의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한석당(閑碩堂). 증조할아버지는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낸 박숙정(朴淑貞)이고, 증조할머니는 대언(代言)을 지낸 민시(閔蒔)의 딸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할아버지는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낸 박원상(朴元象)이며, 할머니는 판밀직부사(判密直副使) 홍언유(洪彦猷)의 딸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다. 아버지는 목사(牧使)를 지낸 박안생(朴安生)이고, 어머니는 한성부 윤(漢城府尹) 김휴(金休)의 딸인 정부인(貞夫人)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다. 부인은 총제(摠制)를 지낸 김익생(金益生)의 딸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안동 김씨와 사재령(司宰令) 이덕배(李德培)의 딸 증정경부인 신평 이씨(新平李氏)이다. 아들 5형제 중 큰아들이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이다. 박중림의 후손들은 현재 하빈면 묘리 묘골에서 세거하고 있다.
[활동 사항]
박중림(朴仲林)[?~1456]은 1417년(태종 17) 생원시, 1423년(세종 5) 문과, 1427년(세종 9) 문과 중시에 차례로 급제하였다. 1427년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 1428년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 1442년(세종 24) 전라도 관찰사, 1451년(문종 1) 경기도 관찰사 등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 공조 참판이 되었으며,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3년(단종 1) 병조 참판·호조 참판·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단종이 신하들에게 대사헌(大司憲)을 맡길 만한 인물을 물었고,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이 박중림을 추천하여 대사헌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세조가 어린 단종을 내치고 왕위를 찬탈하자 박중림은 관직을 그만 두었다. 세조가 박중림을 위무하기 위해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1456년(세조 2) 큰아들 박팽년을 비롯하여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박중림은 아들 박팽년과 함께 모진 고초를 당하였고, 결국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묶고 그 수레들을 끌어서 죄인을 찢어 죽이는 형벌인 환열형(轘裂刑)을 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박중림의 아들 다섯 명과 손자 세 명이 모두 죽었다. 당시 손자 박순(朴珣)의 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가 임신 중이었는데, 뱃속의 아기를 경상도 대구군 하빈현(河濱縣) 묘골[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의 친정에서 출산하였다. 그 소생이 박일산(朴壹珊)으로, 이후 묘골은 박중림 후손의 세거지가 되었다.
[묘소]
묘는 사육신 사건으로 화를 당해 실전(失傳)되었다.
[상훈과 추모]
1739년(영조 15) 복관되었다. 1784년(정조 8)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직되었으며, 문민(文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 19) 단종의 무덤인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식(配食)되었다.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에 위치한 겸천 서원(謙川書院)과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위치한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어 있다. 1977년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육신사(六臣祠)[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경내에 사적비가 건립되었다. 또한 육신사 경내에 충의사(忠義祠)를 건립하여 박중림의 위패를 별도로 봉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