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8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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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惺 |
영어공식명칭 | Park Seong |
이칭/별칭 | 덕응,대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도 현풍현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응(德凝), 호는 대암(大庵). 증조할아버지는 서부 주부(西部主簿)를 지낸 박성림(朴成林)이며, 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박순(朴純)이다. 아버지는 생원(生員) 박사눌(朴思訥), 어머니는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김연(金緣)의 딸 광산 김씨(光山金氏)이다. 부인은 승지(承旨)를 지낸 이광진(李光軫)의 딸 여주 이씨(驪州李氏)이다.
[활동 사항]
박성(朴惺)[1549~1606]은 1549년[명종 4] 경상도 현풍현 솔례(率禮)[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곽간(郭趕)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배신(裵紳)과 정구(鄭逑)에게 학문을 배웠다. 또한 김면(金沔)·이기춘(李起春)·최영경(崔永慶)·장현광(張顯光)·권호문(權好文) 등의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정인홍(鄭仁弘)과는 교유 관계를 맺었으나, 대사헌(大司憲)이 된 후 독단적인 행태를 보이면서 이황(李滉)의 학문을 비판하자 절교하였다.
1567년[선조 즉위]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으며, 1582년[선조 15] 참봉(參奉)에 임명되었고, 1589년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591년 사포서(司圃署) 사포(司圃)에 임명되자 처음으로 출사하였으며, 곧바로 공조 좌랑(工曹佐郞)이 되었다. 1592년 병환으로 사직한 뒤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후 이산 현감(尼山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해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의병을 일으킨 공로로 공조 정랑(工曹正郞)으로 승진하였으며,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박성은 군량 공급에 많은 공을 세웠다. 이 무렵 초유사 김성일이 역질에 걸려 모두 피했는데, 박성 홀로 정성껏 간호했다고 한다.
1593년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부임하였으며, 기축옥사(己丑獄死)로 희생된 최영경(崔永慶)의 신원을 청원하였다. 1596년 형조 정랑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위솔(衛率)에 임명되었으며,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참모로 활동하였고, 주왕산성 대장(周王山城大將)이 되었다. 그리고 16개조로 된 「논시 폐소(論時弊疏)」를 올렸다. 이 상소문은 당시의 폐해를 지적하고, 대책을 개진한 것이다.
1598년 충훈부(忠勳府) 경력(經歷), 세자익위사 위솔과 익위(翊衛), 1599년 익찬(翊贊), 1601년 임천 군수(林川郡守), 1602년 형조 정랑·통례원(通禮院) 상례(相禮)·영천 군수(永川郡守), 1603년 군자감(軍資監) 부정(副正)·청송 부사(靑松府使), 1604년 공조 정랑, 1605년 익산 군수(益山郡守)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박성은 1596년 가족을 데리고 청송 주왕산 아래로 들어갔으며, 이후 여러 번의 관직 임명에도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대암집(大庵集)』6권 4책이 전한다.
[묘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송림(松林)에 묘소가 위치해 있다.
[상훈과 추모]
1641년[인조 19] 박성의 묘소가 위치한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신도비의 비문은 현풍 현감(玄風縣監)을 지낸 김세렴(金世濂)이 작성하였다. 1694년[숙종 20] 신도비 인근에 박성을 배향한 송담 서원(松潭書院)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