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17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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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玄風郭氏 郭澍 諺簡 |
이칭/별칭 | 현풍곽씨 언간,진주 하씨 언간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배혜진 |
[정의]
1989년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진주 하씨 묘에서 발견된 진주 하씨의 남편 곽주가 쓴 한글 편지.
[개설]
1989년 4월 4일 달성군 현풍면[현 현풍읍] 대리에 거주하는 곽병규가 구지면 도동리 석문산성에 있는 12대 할머니 진주 하씨 부인[곽주의 재실]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묘를 열었다. 그 묘의 관 속에서 고인은 미라(mirra)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고 관 속에 넣었던 의복과 문헌[대부분이 서간문]도 잘 보존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묘의 주인인 진주 하씨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던 홍의 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의 종질 사촌 형제의 아들인 곽주(郭澍)[1569∼1617]의 둘째 부인이다. 현풍곽씨 곽주 언간을 포함한 진주 하씨 묘 출토 유물은 1993년 7월 20일 중요 민속 문화재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2006년 운경 재단 이사장 곽동환이 현풍곽씨 곽주 언간을 포함한 진주 하씨 묘 출토 유물 250점을 국립 대구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제작 발급 경위]
현풍곽씨 곽주 언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한글 편지는 진주 하씨의 부군 곽주가 그의 부인에게 쓴 편지가 가장 많고, 곽주가 장모에게 보낸 편지, 곽주가 노비에게 보낸 편지도 포함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곽주의 필적이 108매로 가장 많다. 진주 하씨가 쓴 것이라고 명기된 것은 없으나 필체를 대조하고 서신 사이의 내용상 연관성을 비교해 본 결과 하씨 본인의 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밖에 곽주의 아들들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와 출가한 딸들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출가한 딸이 시누이에게 보낸 편지, 안사돈 간의 편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 편지들은 1602~1652년 사이에 쓰여진 것들이다.
[형태]
발견된 문서 자료는 매수를 기준으로 도합 172매이다. 이 중 한글로 씌어진 것이 167매이고 한문으로 씌어진 것이 5매이다. 매수로는 모두 172매이나 이 중에는 하나의 편지가 사연이 너무 길어 두 장의 종이에 나누어진 것도 있다. 편지의 크기는 47.5×40.7㎝에서 32.3×8㎝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구성/내용]
현풍곽씨 곽주 언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곽주이다. 곽주는 홍의 장군으로 유명한 망우당 곽재우의 종조카이다. 이 편지가 나온 무덤의 주인공인 진주 하씨 부인은 곽주의 둘째 부인으로 하준의의 맏딸이다. 진주 하씨의 친정은 창녕군 이방면에 있는 오야 마을인데 이 마을에는 지금도 진주 하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현풍곽씨 곽주 언간에는 17세기 초 경상도 현풍의 소례 마을[현 달성군 현풍읍 대리]과 인근에서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온갖 사연과 삶의 모습들이 구구절절 묘사되어 있다. 특히 곽주가 아내 진주 하씨에게 보낸 편지의 사연이 가장 다채롭다. 곽주가 절에 들어가 공부를 하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과거길에 나서서 새재를 넘고, 충주를 지나 서울로 들어가는 여정이 나타나기도 한다. 도동 서원에서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의 제를 지내기 위해 소를 잡는 이야기, 서울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갈 것이니 손님 맞을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 성인이 되는 아들의 관계를 치르는 이야기, 노복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장사를 잘 치르도록 관과 음식을 마련해 주는 이야기, 출산에 임박하여 친정에 간 아내에게 딸을 낳아도 당신만 건강하면 괜찮다고 하는 이야기, 질병에 시달리며 치료를 위해 애쓰는 이야기 등 조선 시대 사람의 일상생활이 이 편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의의와 평가]
진주 하씨 묘에서 출토된 현풍곽씨 곽주 언간은 17세기 초기의 자료이다. 1602년~1646년에 걸쳐 있는 이 편지들은 분량이 많을 뿐더러 내용도 다채로워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현풍곽씨 곽주 언간에는 17세기 초기를 살았던 곽주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주변의 친지들과 노복 등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며, 이들의 생활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이 편지들은 조선 시대 풍속과 민간 신앙 등 생활 문화 연구에 크게 기여할 수 있으며 400년 전 우리말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