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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완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3058
한자 河在玩
영어공식명칭 Ha Jaewa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32년 1월 10일연표보기 - 하재완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46년 - 하재완 대구공업중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47년 4월 - 하재완 남로당 산하 민주애국청년동맹 대구공업중학맹원으로 가입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8년 3월 - 하재완 대구지방소년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6개월간 교화 처분
활동 시기/일시 1960년 - 하재완 민주민족청년동맹 경상북도연맹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75년 4월 8일 - 하재완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몰년 시기/일시 1975년 4월 9일연표보기 - 하재완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7년 1월 23일 - 하재완 서울지방법원에서 무죄 판결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5년 11월 - 하재완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 판결
추모 시기/일시 매년 4월 9일 - 4.9통일평화재단[서울]과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대구]에서 인혁통일열사 추모문화제 거행
출생지 안리 -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안리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학교|수학지 대구공업중학교 - 대구광역시 지도보기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묘소 현대공원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다부거문1길 51-75[가천리 919]
성격 사회운동가|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 희생자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민주민족청년동맹 경상북도연맹 총무

[정의]

대구에서 활동한 사회운동가이자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 희생자.

[개설]

하재완(河在玩)[1932~1975]은 박정희 정권이 유신 반대 시위를 잠재우기 위하여 1974년에 조작한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에 연루되어 희생되었다.

[가계]

하재완의 아버지는 하대학이고, 부인은 이영교이다.

[활동 사항]

하재완은 1932년 1월 10일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안리에서 태어나 1946년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47년 4월 남조선노동당 산하 민주애국청년동맹 대구공업중학맹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48년 3월 대구지방소년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6개월간의 교화 처분을 받았다. 이후 단국대학교를 졸업하였고, 1950년 군에 입대하여 1957년 중사로 제대하였다. 1960년 4·19혁명 이후에는 서도원(徐道源)·도예종(都禮鍾)·송상진(宋相振) 등과 함께 민주민족청년동맹 경상북도연맹을 조직하고 총무를 맡아 한미 경제협정 반대, 일본 경제인 입국 반대, 이대악법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유신 반대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1974년 4월 3일 「대통령 긴급조치 4호」를 공포한 후 1964년 1차 인민혁명당사건 관련 인사들을 체포하여 고문과 강압수사 끝에 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의 배후 조직으로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을 조작하였다. 하재완은 핵심 관련자의 한 사람으로 구속되어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우홍선(禹洪善)·김용원(金鏞元)·이수병(李銖秉)·여정남(呂正男)·송상진·서도원·도예종과 함께 사형을 언도받았고, 다음 날인 4월 9일에 곧바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묘소]

하재완의 모소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가천리 919 현대공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 재심 공판에서 우홍선을 비롯한 희생자 8인에 대하여 무죄가 선고되었다. 2015년 11월 서울고등법원에서도 인민혁명당사건 관련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1994년 4월 9일 서울 서대문독립공원에서 민청학련사건 20주년 기념식 및 인혁당 추모제가 거행되었으며, 2005년 4월 8일 명동성당에서 인혁당 희생자 3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2006년 4·9인혁재단이 설립되어 매년 4월 9일을 전후하여 희생자를 기리는 ‘4·9 통일열사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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