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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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唐津北倉 |
영어공식명칭 | Site of Dangjin North-warehous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학로 |
소재지 | 당진 북창 터 - 충청남도 당진시 우두동 태실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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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조운 창고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우두동에 있던 당진현의 공세미 보관 창고.
[개설]
당진 북창(唐津北倉)은 조선 시대 당진현에서 관리하던 현물 세곡을 보관하던 조창이다.
[변천]
『당진읍지』를 보면 당진현에는 읍창, 북창, 해창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당진 북창은 조선 초기에 당진현의 북쪽에 설치되었던 조창으로 보관했던 공세미는 조운선을 통해 경창으로 옮겨 갔다. 당진 북창은 채운포 연변에 있으며 당진현에서 북쪽으로 5리 거리에 있고, 동쪽 창고가 3간, 서쪽 창고가 4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같은 기록이 있는데, 다만 『당진읍지』에서는 북창의 거리가 당진현에서 북쪽으로 5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한 데 비해서 『대동지지』에서는 15리에 위치한다고 기록한 것이 다르다. 조선 말 세금의 금납화로 조창이 폐지되었다.
[위치]
당진 북창은 충청남도 당진시 우두리 태성 마을에 있었는데, ‘태성’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이곳에 성이 있었기에 태성 마을이라 했다고 전한다. 당진 북창이 있던 태성 마을은 아산만으로 흐르는 역천이 채운포 연변을 휘돌아 지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역천을 타고 들어온 조류는 내륙 깊숙한 곳까지 조운선의 운항을 가능하게 했기에 태성 마을에 당진 북창을 세워 공세미를 보관하였던 것이다.
[현황]
일제 강점기에는 옛날 조창이 있던 나루터로서의 역할이 그대로 계승되어 해방 전에는 연평도까지 조기잡이를 나가는 배가 있었으며, 그 밖에 새우젓, 홍어, 민어, 숭어 등을 잡은 배가 들어오기도 했다. 서산시 운산면 사람들이 새우젓을 사러 채운포변 채운 다리 밑에 있는 북창 터까지 1960년대까지도 찾아왔다고 한다. 1919년에는 서산군 가야산에서 이곳 북창까지 약 40리 정도의 거리에 철로를 부설하여 이왕직 소유의 가야산에서 벌채한 대량의 목재를 이곳까지 운반한 후 해로를 이용하여 인천항으로 수송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역천 입구가 폭이 넓어서 바닷물이 많이 들어오던 곳이지만 지금은 석문 방조제(石門防潮堤)에 막혀서 바닷물이 들어올 수 없다. 현재 당진 북창 터의 위치는 알 수 있으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당진현 관할의 당진 북창은 공세미의 보관과 운송을 위한 조창이었지만, 당진 북창을 통해 경창으로 운송되는 조운선의 출입으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져 당진의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