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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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璜神道碑 |
영어공식명칭 | Yunhwang Memorial Ston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학로 |
건립 시기/일시 | 1607년 - 윤황 묘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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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34년 - 윤황 묘역 단장 및 신도비 건립 |
보수|복원 시기/일시 | 2002년 - 윤황 후손들이 송악재 성역화 추진 위원회 구성 및 묘역 정비 |
현 소재지 | 윤황 신도비 - 충청남도 당진시 당진동 시곡 2리 |
원소재지 | 윤황 신도비 - 충청남도 당진현 관정리[현 당진시 송악읍] |
성격 | 신도비 |
관련 인물 | 이성계|이방원|길재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57㎝[가로]|150㎝[세로]|26㎝[두께]|197㎝[가첨석 포함 전체 높이] |
관리자 | 송악재 성역화 추진 위원회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시곡리에 세워진 윤황의 신도비.
[윤황]
윤황(尹璜)은 고려 말의 충신으로 자호는 후송이며, 광성대부 문하평리 공조 전서[판서]를 역임하였다. 윤황은 도평의녹사 문하평리 윤수균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성계가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개국하자 당시의 최고 행정 관청인 문하부의 문하평리 벼슬에 있던 윤황은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기로 마음 먹고 송악[개성]의 송악산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일찌기 고려 삼은으로 알려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목은(牧隱)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재(吉再)와도 교유를 했고 후에 조선 3대 임금이 된 태종 이방원(李芳遠)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이후 윤황은 충청도 면천군 송악으로 내려가서 소나무와 매화를 심으며 망국의 신하로서 절개를 지키며 살았다. 윤황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벼슬길에 올랐다. 큰아들 윤덕생(尹德生)은 서산 군수를 거쳐 판서에 이르렀고, 둘째 아들인 윤예생(尹禮生)은 대사성과 도승지, 셋째 아들인 윤규(尹奎)는 판사, 넷째 아들인 윤임(尹臨)은 함길도(咸吉道) 관찰사를 역임했다. 이들 4형제 중 막내인 윤임의 자손들이 가장 번성했다.
[건립 경위]
윤황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세종은 즉시 충간(忠簡)이란 시호를 내리고 국사 무학을 보내 당진현 관정리[현 당진시 송악읍]에 장지를 정하여 장례를 돌보게 했으며, 서산 송곡 서원(松谷書院)에 배향해 향사를 받들게 했다. 그 후 윤황의 7세손 윤돈이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1607년(선조 20년) 묘지를 찾아 묘비를 세웠고, 9세손인 대원군 윤효전이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비석도 세우고 비문을 추가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비문은 1934년 묘역을 새로 단장하고 신도비를 세웠을 때 15대손 윤익현이 글을 짓고 18대손 윤인섭이 글씨를 썼다.
[위치]
윤황 신도비는 충청남도 당진시 당진동 시곡 2리 윗구물 마을 산기슭에 있다.
[형태]
윤황 신도비는 가로 57㎝, 세로 150㎝, 두께 26㎝, 가첨석을 포함한 전체 높이 197㎝이다.
[금석문]
비명(碑銘)은 "고려 전서 충간공 후송 남원 윤 선생 신도비명(高麗典書忠簡 公南原尹先生神道碑銘)"이다.
[현황]
윤황과 할아버지인 전서공 윤영찬, 아버지인 평리공 윤수균의 단을 함께 조성하였는데 이를 송악재라고 한다. 2002년 후손들이 송악재 성역화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여 묘역을 정비해 사적비를 세우고 합사 제단을 만드는 등 묘역 성역화 작업을 완료하였다. 시향일은 음력 10월 5일이다.
[의의와 평가]
윤황의 신도비는 고려 말 충신의 묘역과 신도비를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