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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438
한자 慶州金氏孝烈碑
영어공식명칭 Stone Monument for Loyal Servant Virtuous Lady of Gyeongju Gim Cl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936년 - 경주김씨 사망
건립 시기/일시 1937년연표보기 - 경주김씨 효열비 건립
현 소재지 유인 경주김씨 효열비(孺人慶州金氏孝烈碑)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적서리 473 지도보기
원소재지 유인 경주김씨 효열비(孺人慶州金氏孝烈碑)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적서리 473
성격 효열비
관련 인물 차숙보(車淑輔)|차상학(車相鶴)
재질 받침돌과 옥개석[가첨석]은 화강석|비신은 오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165㎝[전체 높이]|120㎝[비신 높이]|40㎝[비신 너비]|19㎝[비신 두께]

[정의]

대호지면 적서리에 있는 차숙보의 며느리 경주김씨의 효열비.

[개설]

경주김씨(慶州金氏)대호지면 적서리의 부호였던 차숙보(車淑輔)[1859~1945]의 며느리였다. 경주김씨는 남편이 사망한 뒤에도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고, 집안일은 물론 남편을 대신하여 인천을 자주 왕래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해난 사고로 사망하였다. 이에 주민들이 효열비를 세웠다.

[건립 경위]

경주김씨의 시부모에 대한 효심을 기리기 위하여 1937년 대호지면 적서리 진흥회에서 경주김씨 효열비(慶州金氏孝烈碑)를 세웠다.

[위치]

경주김씨 효열비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적서리 473번지 뱃말의 도로변에 있다.

[형태]

경주김씨 효열비는 직사각형의 받침돌에 오석의 비신(碑身)[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을 세우고, 옥개석[지붕돌]을 얹었다. 비의 전체 높이는 165㎝, 비신의 크기는 높이 120㎝, 너비 40㎝, 두께 19㎝이다.

[금석문]

효열비의 전면에는 ‘유인 경주김씨 효열비(孺人慶州金氏孝烈碑)’라고 새겼고, 좌우면과 후면에는 경주김씨의 행적을 새겼다. 이병관(李炳觀)이 비문을 짓고, 김병흥(金炳興)이 글씨를 썼다.

[현황]

경주김씨는 김영제(金英濟)의 딸이다. 열여섯 살 때 적서리의 부호였던 차숙보의 맏아들 차상학(車相鶴)에게 시집을 갔다. 차숙보는 구한말 판임관을 지낸 적서리 연안 차씨(延安車氏)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경주김씨는 혼인한 지 1년 만에 딸을 낳았고, 그 직후 남편은 병으로 사망하였다. 차숙보는 젊은 며느리가 홀로 사는 것을 가엾게 여겨 재혼할 것을 권하였지만 경주김씨는 “저는 이미 차씨 집안의 사람인데 어찌 다른 마음을 먹겠습니까? 재혼을 하지 않고 시부모님을 더 열심히 모시겠습니다.”라며 집안일을 더욱 열심히 하였다. 심지어 차숙보의 심부름으로 서울과 인천 등지를 오가며 생업에 뛰어들기도 하였다. 가사를 돌보면서도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경주김씨에게 주위 사람들은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1936년에 시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인천을 다녀오던 경주김씨는 팔미도 앞바다에서 해난 사고을 당해 사망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마을 주민들은 적서리 진흥회를 조직하고, 남편과 시부모를 위해 최선을 다하던 경주김씨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1937년에 효열비를 세웠다.

[의의와 평가]

경주김씨 효열비 옆에는 2009년에 세운 ‘문선 차숙보 임공덕비(文善車淑輔任功德碑)’가 나란히 서 있고, 연안 차씨의 중시조인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를 배향하는 문원사(文苑祠)가 부근에 있다. 동족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연안 차씨 가문의 효성을 선양하기 위해 적서리 주민들이 세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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