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581 |
---|---|
한자 | 李萬囿 |
영어공식명칭 | Yi Manyu |
이칭/별칭 | 숙함(淑咸),사상당(四尙堂),한원군(韓原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남석 |
출생 시기/일시 | 1684년 - 이만유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719년 - 이만유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28년 - 이만유 진무 이등 공신 책봉 |
활동 시기/일시 | 1748년 - 이만유 경상 좌수사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750년 - 이만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76년 - 이만유 신도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899년 - 한원사 건립 |
묘소|단소 | 이만유 묘소 - 전라남도 담양군 월산면 |
사당|배향지 | 한원사 -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거산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한산(韓山) |
대표 관직 | 경상 좌수사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 사당과 영정을 둔 조선 후기의 무신.
[개설]
이만유(李萬囿)[1684~1750]는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영조 때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를 지냈고, 1728년(영조 4)에 청주에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을 평정하였다.
[가계]
이만유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숙함(淑咸), 호는 사상당(四尙堂)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15대손이다.
[활동 사항]
이만유는 1719년(숙종 45)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의주 부윤(義州府尹)과 형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728년(영조 4)에 도순무사(都巡撫使)에 올랐고, 청주에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하자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의 관군과 함께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이때의 전공으로 진무 이등 공신(振武二等功臣)이 되었으며 한원군(韓原君)에 봉해졌다. 1748년(영조 24) 경상 좌수사를 지냈다. 이만유는 말년에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천변리로 낙향하여 1750년에 사망하였다.
[묘소]
이만유의 묘소는 전라남도 담양군 월산면에 있다.
[상훈과 추모]
한원사(韓原祠)는 이만유의 공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으로 1899년에 건립되었다.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거산리 도암(陶巖)에 위치한 한원사에는 이만유의 유품인 장검·전통(箭筒)·활·교지·영정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만유 장군 유물은 1978년 12월 30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었다.
전라남도 담양군 월산면 화방리 319번지 봉명 마을에는 이만유 신도비(李萬囿神道碑)가 있다. 비문은 1864년 우의정을 지낸 이경재(李景在)가 지었으나 이때 바로 세우지 못하고, 1876년 담양 부사로 부임한 김성진(金成鎭)이 이만유 후손들의 도움을 받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