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5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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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蓍慶 |
영어공식명칭 | Yi Sigyeong |
이칭/별칭 | 약산(藥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남석 |
활동 시기/일시 | 1597년 - 이시경 소촌 찰방 부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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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597년 - 이시경 사망 |
사당|배향지 | 약산사(藥山詞)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송전리 369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전주(全州) |
대표 관직 | 소촌 찰방(召村察訪)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 충신 정려가 있는 조선 시대 무신.
[개설]
이시경(李蓍慶)[?~1597]은 정유재란 때 군공을 세웠으나 전사하였다. 1792년 정조 때 충신 정려를 내렸는데, 현재 당진시 대호지면 송전리에 있다.
[가계]
이시경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호는 약산(藥山)이다. 영의정을 지낸 이양원(李陽元)의 셋째 아들이다.
[활동 사항]
이시경은 진사과에 급제한 뒤 세자 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로 발탁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아버지가 유도대장(留都大將) 겸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임명되자 이시경은 종사관으로 수행하였다.
선조가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몽진했다는 소문을 듣고 이양원이 단식 끝에 사망하자, 이시경은 아버지 묘소 곁에서 움막을 짓고 시묘(侍墓)하던 중 어머니까지 사망하여 전후 4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시경은 1597년에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소촌 찰방(召村察訪)을 제수받아 바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역졸 및 의병 500여 명을 모아 경상도 남강 하류에서 적군을 기습 공격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시경은 왜군을 추격하던 중 다리 밑에 숨어 있던 적의 기습을 받아 1597년 9월 21일 3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시경의 유해는 수습되지 못했고 종이 옷만을 거두어 아버지의 묘소 옆에 의관장(衣冠葬)을 치렀다.
[묘소]
이시경의 묘소는 없고, 충신 정려인 약산사(藥山詞)[또는 세마별묘(洗馬別廟)]가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송전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시경의 충절을 기려 1792년(정조 16) 9월 5일에 조정에서 충신 정려를 내렸다. 1995년 당진군에서 중수하였다. 현판 내용은 ‘충신 증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행통정대부 소촌 찰방 이시경지문(忠臣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行通政大夫召村察訪李蓍慶之門)’이다. 이시경의 충신 정려 뒤에는 아버지 이양원의 신위를 배향한 문헌묘(文憲廟)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