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613 |
---|---|
한자 | 金允植 |
영어공식명칭 | Gim Yunsik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학로 |
출생 시기/일시 | 1835년 - 김윤식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874년 - 김윤식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87년 - 김윤식 당진 면천으로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 김윤식 외무아문 대신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 김윤식 외무아문 대신 면직, 제주목에 정배 |
몰년 시기/일시 | 1922년 - 김윤식 사망 |
출생지 | 김윤식 출생지 - 서울특별시 |
유배|이배지 | 김윤식 유배지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하리 절골 |
유배|이배지 | 제주목 - 제주특별자치도 |
성격 | 문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청풍 |
대표 관직 | 외무아문 대신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서 유배 생활을 한 문신·학자.
[개설]
김윤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박지원의 손자인 개화파 박규수의 문인이다. 영선사로 청나라에 들어가 위안스카이를 만난 이후 어윤중과 함께 친청 온건 개화파를 대표하였다. 명성 황후와 대립하여 당진 면천에서 6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면천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면양 행견 일기』를 저술하였는데, 일기에서 면천 등 내포 지방의 다양한 인물과 풍속 등을 기록하여 당진 향토사 연구에 필요한 많은 자료를 남겼다.
[가계]
김윤식의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이다. 아버지는 증 이조 판서·좌찬성 김익태(金益泰)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어려서 부모가 모두 사망하자 숙부 김익정(金益鼎)에게 의탁해 성장하였다.
[활동 사항]
김윤식은 1874년 문과에 급제한 뒤 황해도 암행어사·문학·시강원 겸 사서·부응교·부교리·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오군란 수습에 관여하여 호군(護軍)·강화부 유수에 임명되고 규장각 직제학을 겸임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김홍집(金弘集)·김만식(金晩植)과 함께 위안스카이에게 구원을 요청해 청나라 군대와 친군 좌우 영병(親軍左右營兵)이 창덕궁을 점거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 정변을 끝냈다.정변 이후 병조 판서를 거쳐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어 대외 관계를 담당하였다. 1887년 5월 부산 첨사 김완수(金完洙)가 일상 사채(日商私債)에 통서(統署)의 약정서를 발급하였다는 죄목으로 면천으로 유배되어 5년 6개월을 지냈다. 1894년 석방되었고, 같은 해 7월 정부 기구의 개편에 따라 외무아문 대신(外務衙門大臣)에 임명되었다. 김윤식은 갑오개혁의 입안자로 참여하는 한편, 일본에 의해 국권이 잠식당하는 굴욕적인 모든 조약이나 조처에 순응하였다. 1896년 아관 파천이 일어나자 외무아문 대신직에서 면직되었고, 을미사변과 관련해 탄핵을 받고 제주목(濟州牧)으로 종신 정배되었다. 일제 강점 후 중추원 부의장직과 작위, 연금 등을 주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후에 고종과 순종의 권유에 따라 작위는 받았다.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이용직(李容稙)과 더불어 독립을 청원하는 「대일본 장서(對日本長書)」를 제출하여 저항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윤식의 저서로는 『운양집(雲養集)』, 『임갑령고(壬甲零稿)』, 『천진담초(天津談草)』, 『음청사(陰晴史)』, 『속음청사(續陰晴史)』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