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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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周源 |
영어공식명칭 | Jeong Juw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남석 |
출생 시기/일시 | 1870년 - 정주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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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정주원 서용범 의병에 투신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7월 - 정주원 일본 경찰에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11월 - 정주원 징역 3년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25년 - 정주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2년 - 정주원 건국 훈장 건국 포장 추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4년 11월 19일 - 의병장 정주원 숭의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정주원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정주원 출생지 - 충청남도 당진시 고대면 용두리 |
거주|이주지 | 정주원 거주지 - 충청남도 당진시 고대면 용두리 |
활동지 | 정주원 활동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
묘소 | 정주원 묘소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가학리 |
성격 | 의병장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의병장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출신의 항일의병장.
[개설]
정주원(鄭周源)[1870~1925]은 1907년 군대 해산 후 일제 침략에 항쟁한 항일 의병장이다. 충청도와 경기도를 통합하는 13진도 총대장에 올랐고, 수백 명에 달하는 의병을 지휘하였다. 정주원은 치열한 항쟁 중이던 1908년 대호지면 적서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복역 후 송악면 가학리에서 살다가 1925년에 사망하였다.
[가계]
정주원의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아버지는 정일항(鄭日恒), 어머니는 거창 신씨(居昌愼氏)이다. 정주원의 첫 부인은 전주 이씨(全州李氏), 두 번째 부인은 달성 서씨(達城徐氏)이다.
[활동 사항]
정주원은 당진시 고대면 용두리 출신으로 경기도 안성시 죽산에서 창의한 당진 출신의 의병장이다. 정주원은 양반 출신이지만 경제적으로는 빈곤했다. 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직후, 서용범(徐用凡) 의병에 투신하여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정주원은 용인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죽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죽산, 수원, 안성 등 경기도 일대에서 항전하였으며, 충청도 당진과 서산 등지로 배를 이용해 이동하면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주원은 400~500명의 의병을 거느리면서 활약하였다. 한때 경기, 충남북 지역의 의병 연합체인 13진도 총대장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의 부대원으로는 최종성·정선경·하군배·심주현·김성백·최기운·손응현·신준중·손성오 등의 당진 출신과 서산 출신의 이상덕·김쌍봉, 덕산 출신의 조성습 등이 있으며, 경기 출신인 안춘경·신현구·최국만·박덕삼·황명운 등이 있다. 일부 대원들은 정주원이 체포된 후에도 의병을 인솔하고 항일전을 지속하였다.
정주원 의병대는 정주원과 심주현 등이 양반으로 알려졌으나, 그 외 의병들은 농업에 종사하던 평민 출신으로 보인다. 또한 일부는 어물상이나 대장장이 같은 직업을 가진 인물도 있었다. 이들은 1908년 여름까지 활발한 투쟁을 벌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일본 경찰과 한인 경찰을 사살하고, 침략의 하수인인 일본 상인과 친일파 일진회원을 체포하여 처단하였다. 그러나 1908년 7월 정주원 의병장이 체포된 후, 당진 의병의 활동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정주원은 체포되기 전, 다섯 명의 호위병을 이끌고 대호지면 적서리의 대부호인 차숙보(車淑輔)[1859~1945]의 집에 숨어 3개월간 살았다. 그리고 부근에 있는 적서리 방구 바위 산기슭에 있던 당재 강당과 구지정(九芝亭)에 활터와 과녁을 만들어 놓고 마을 장정들을 훈련시켰다. 증언 기록에 따르면, 1908년 7월 19일 암호 약속을 잘못하여 의병 4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들이 일본 경찰에 매수당하면서 정주원이 체포되었다고 전한다.
정주원은 1908년 11월 경성 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종신 유형과 징역 3년으로 감형받았다. 정중원은 복역 후 석방되어 송악면 가학리에 거주하다가 1925년 1월 경기도 평택시 오성면 숙성리에서 5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
정주원의 묘소는 정주원이 사망한 경기도 평택시 오성면 숙성리에 있다가, 1940년 당진시 송악읍 가학리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정주원의 공적은 향토 사학자 신양웅과 홍석표의 노력으로 각종 사료를 통해 알려져, 1982년 8월 15일에 건국 훈장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다. 1990년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정주원의 공훈을 기려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84년 11월 19일에는 당진군과 충청남도의 지원비를 받아 묘소를 정화하였고, ‘의병장 정주원 숭의비(義兵將 鄭周源 崇義碑)'[홍석표 짓고 채규선 씀]를 묘소 앞에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