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7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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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錫麟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류정선 |
출생 시기/일시 | 1914년 2월 24일 - 이석린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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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36년 - 이석린 조선어 학회 가입 |
추모 시기/일시 | 1997년 - 이석린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이석린 출생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
거주|이주지 | 이석린 거주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조선어 학회원 |
[정의]
일제 강점기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석린(李錫麟)은 1914년 2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쌍문리[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에서 태어났다. 1936년경 조선어 학회(朝鮮語學會)에 가입하여 기관지인 『한글』의 편집을 맡아 하였다. 조선어 학회는 1931년 조선 어문의 연구와 통일을 체계화·조직화하기 위해 기존의 조선어 연구회(朝鮮語硏究會)를 개칭하여 만든 단체이다. 조선어 학회는 국어를 계몽·선전하였으며, 국어의 통일 운동을 전개하고 국어사전의 편찬을 시도하였다. 『한글』은 1932년 5월 창간되어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극심해졌던 1942년 5월로 중단되기까지 한글의 정리와 통일 및 보급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석린은 1938년 춘천 고등 보통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상록회(常綠會) 활동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1939년 불기소로 방면되었다. 그러나 1942년 10월 소위 조선어 학회 사건에 연루되었다. 조선어 학회 사건은 중일 전쟁 이후 1938년부터 학교에서 한국어 과목 폐지, 공공기관에서 한국어 사용 금지, 조선어 신문 발행 금지,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 강화 등 민족 말살 정책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당시 이석린을 비롯한 조선어 학회 관계자들은 『큰 사전』 편찬 작업에 힘을 쏟고 있었는데, 일제는 사전 편찬 사업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각성시킬 것을 우려하여 조선어 학회의 모든 활동을 범죄 행위로 단정하며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조선어 학회 관계자 33명이 검거되었으며, 증인으로 취조를 받은 사람도 48명이나 되었다. 이석린은 1942년 10월 검거되어 1년여의 옥고 끝에 1943년 기소 유예로 풀려났다.
[상훈과 추모]
1997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