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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1830
한자 蘆海面長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류정선

[정의]

일제 강점기 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이었던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의 최고 행정직.

[개설]

조선 시대까지 중앙 정부가 직접 관리를 파견하여 관할하는 최하위 행정 단위는 군현(郡縣)이었다. 하지만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서구의 근대적 행정 관료 시스템을 도입하고 군현 단위의 기존 행정 구역을 개편하였다. 그리고 말단의 행정 구역에 이르기까지 효율적인 식민 통치를 위해 군(郡)을 약화시키면서 면(面)을 강화하고 면장의 권한을 확대하였다.

[면제의 변천]

1. 말단 행정기구로서 면의 신설

일제는 통감부 시대인 1906년 기존에 수령과 서리가 담당하던 징세 업무를 면장에게 넘기며 처음으로 면장을 하부 통치 기구의 하나로 삼았다. 이후 면장의 권한이 점차 확대되어 징세 업무와 경찰의 보조자 역할뿐만 아니라 ‘토지 조사’ 사업의 담당 실무자로도 참여하게 되었다.

한일 병합 후 조선 총독부는 말단 행정 기구로서의 면의 지위를 확정하였다. 지방에 따라 달리 불리던 것을 면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하고, 도장관(道長官)[오늘날의 도지사]이 면장을 임명하고 판임관(判任官) 대우를 했으며, 면사무소를 설치하여 기존의 면장의 거주지를 대신하여 면 사무를 처리할 수 있게 하였다.

1917년 면제를 시행하게 되었지만, 조선 총독부가 면을 사업의 주체로 규정하면서도 법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면은 독자적인 사업을 시행할 권한이 없었다. 또한 면의 조례 제정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면은 면장을 중심으로 하는 자치권이 부정되고 상부의 지시만 수행하는 말단 기구에 불과하였다.

2. 면의 자문 기관인 면협의회 설치

1919년 3·1 운동 이후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은 신시정(新施政)의 하나로 지방 제도의 개혁을 내걸고 각 행정 단위마다 자문 기관을 설치하였다. 면에는 면장을 당연직 의장으로 하는 면협의회를 설치했으며, 면협의회원은 면의 상위기관인 군수가 임명하였다. 면협의회의 자문 사항은 예산과 부과금, 사용료·수수료 또는 부역·현품의 부과 징수, 차입금에 관한 사항 등으로 극히 한정적이었다. 개회권도 면장의 권한이어서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았다. 1930년에 제2차 지방 제도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 개정의 핵심은 부(府)·읍(邑)·면(面)을 법인으로 인정하고 관련 자문 기관을 의결 기관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그러나 면협의회는 여전히 자문 기관으로 남았다. 다만 면협 의원 선출은 임명제에서 선거제로 바뀌었다.

3. 일제 말 물자와 인력 동원 주체가 된 면장

조선 총독부는 강점 초기부터 지역의 명망가들을 면장으로 끌어들여서 지방 지배를 효율성을 기하였다. 하지만 식민 지배에 대한 조선인들의 거부감, 면장의 제한된 권한 등으로 인해 면장직은 주로 하급 계층에서 충원되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면 제도가 확립되며 처리해야 할 사무도 증가하고 면장에 대한 대우도 좋아지면서 행정적 능력이 있는 인물들이 면장으로 충원되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농촌 진흥 운동·농가 경제 갱생 운동의 시행으로 면의 사무가 폭증하게 되었고, 면민에 대한 효율적인 지배와 동원을 위해 거물급 인사들도 면장으로 취임하였다. 중일 전쟁이 발발한 이후 일제는 전시 동원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1937년에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을, 1940년에는 ‘국민 총력 운동’을 벌였다. 당시 읍면 단위에서도 ‘국민정신 총동원 읍면 연맹’을 조직하여 면장이 연맹의 장이 되고, 정동리 부락 연맹(町洞里部落聯盟)과 읍면을 구역으로 하는 단체를 편입하여 전시 동원에 일조하였다. 전시 하에 면장은 물자 및 인력 동원과 함께, 특히 징용 및 징병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로 인해 해방 이후 친일파로 타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면내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역대 노해면장]

『조선 총독부 급 소속 관서 직원록』과 『대한민국 정부 직원록』에 의하면 1919년부터 1952년까지의 노해면의 면장은 1919년 김대진(金大鎭), 1920~1923년 김우진(金友鎭), 1924~1925년 김익수(金益秀), 1926~1935년 강원달(康元達), 1936년 홍재설(洪在卨), 1937~1939년 한상덕(韓相德), 1940년 서원의웅(西原義雄), 1941~1942년 평산수길(平山秀吉), 1945~1949년 및 1952년 김태열(金泰烈)이 각각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40년부터 일본식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 눈에 띄지만 1940년 2월부터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실시되면서 조선인 중에서도 일본식 이름으로 변경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이 일본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태평양 전쟁 말기로 가면서 종이 부족과 각종 물자 부족 및 인력난으로 인해 『조선 총독부 급 소속 관서 직원록』이 발간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943년부터 해방 전까지는 누가 면장을 역임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또 6·25 전쟁 기간이었던 1950년과 1951년도 역시 전쟁 상황 때문에 직원록이 발간되지 않아 관련 기록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해방 직후부터 계속해서 면장을 역임한 김태열이 이 시기에도 면장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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