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1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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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장승배기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창우 |
소재지 | 장승백이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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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자연마을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장승백이는 동작구 노량진동과 상도동의 경계에 있는데, 고개턱에 장승이 서 있던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곳에 장승을 세우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시대에 장승백이 일대는 인가가 없는 울창한 나무숲이었는데,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1789년(정조 13)에 양주 배봉산 기슭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소를 수원 근교 화산으로 옮겼다. 이후 아버지 사도세자를 한시도 잊지 못해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현륭원(顯隆園)에 자주 행차하였다.
정조는 현륭원으로 가는 길목인 이 지점에서 한번쯤 쉬어가야 했지만, 나무숲이 우거져 적적하였고 쉴 수 있는 마땅한 공간도 없었다. 이에 정조는 “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워라. 하나는 장사(壯士) 모양을 한 남상장승(男相長承)을 세워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상(女相)을 세워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으로 하여라.”라고 명하였고, 장승백이에는 곧 두 개의 높은 장승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곳은 ‘장승백이’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고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는 길에 이 장승 앞에 어가를 멈추고 쉬었다고 한다.
한편 장승백이 설화와는 달리 영조(英祖) 연간에 만들어진 「해동지도(海東地圖)」에 ‘과천계장생현로(果川界長栍峴路)’라는 지명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장승백이'라는 지명은 더 오랜 역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형성 및 변천]
1930년대 조선총독부에서는 미신 타파 명목으로 장승백이에 있었던 장승을 없애고 아카시나무 몇 그루를 심었다. 1991년 11월에 노량진2동 바르게살기위원회에서 장승을 옛 모습대로 다시 세워 놓았다. 현재는 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역 6번 출구 앞 동작도서관 옆에 표석을 세우고 다시 장승을 세웠다.
[현황]
동작구에서는 매년 10월 24일 ‘장승배기 장승제’인 향토축제가 진행되고 있다. 마을의 안전을 지켜주던 장승 앞에서 동제(洞祭)를 지냈으며, 현재는 대방장승 앞에서 전통놀이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어울리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과거의 공동체적 풍습과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1991년 처음 시작한 이후 행사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장승배기 장승제에는 동작구의 주요 단체와 구민들이 함께 참여하며, 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역과 가까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동작구의 대표적인 마을 축제가 되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장승제가 공동체적 풍습과 전통의 맥을 있는 고유의 미풍양속으로서의 그 가치가 있어 2015년 12월 24일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하고 장승제를 보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