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37
한자 南慈賢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황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2년 12월 7일연표보기 - 남자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9일 - 남자현 중국 요녕성 통화현(通化縣) 이주
활동 시기/일시 1926년 12월 - 남자현 조선혁명자후원회 발기인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7년 2월 - 남자현 구명운동 전개
활동 시기/일시 1933년 2월 9일 - 남자현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33년 8월 - 남자현 옥중 단식투쟁
몰년 시기/일시 1933년 8월 22일연표보기 - 남자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남자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67년 6월 - 남자현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봉안
출생지 남자현 출생지 -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활동지 남자현 독립운동 활동지 - 중국 길림성 일대 및 하얼빈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조선혁명자후원회 발기인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된 독립운동가.

[개설]

남자현(南慈賢)[1872~1933]은 전통적인 규범에서 성장한 여성으로 1919년 46세에 만주로 망명하여 근대적 교육계몽운동과 의열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남자현의 본관은 영양(英陽)이며, 아버지 남정한(南廷漢)과 어머니 진성 이씨 사이에서 1남 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남자현은 1872년 12월 7일 영양군 석보면(石保面)에서 태어났다. 1891년 석보면의 김영주(金永周)와 결혼하였으나 남편은 얼마 후 을미의병(乙未義兵)에 참가하여 1896년 7월 11일 진보면(眞寶面) 홍구동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후 12월 영양군 수비면 계동에서 유복자 김성삼을 출산하였으며, 시부모를 정성을 다해 봉양하였다.

1919년 2월 말 경성 남대문 통에 살던 김씨 부인의 편지를 받고 상경하여 남대문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3·1운동에 참가한 후 3월 9일 만주 통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여 독립군의 활동을 뒷바라지 하였으며, 교회를 중심으로 교육활동과 여성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4월 채찬(蔡燦), 이청산(李靑山), 김문거(金文居) 등과 함께 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김문거로부터 권총 1자루와 탄환 8발을 받아 경성의 혜화동 지인의 집에 머무르며 기회를 엿보았으나 거사를 결행하지 못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1926년 12월에는 길림성 반석현에서 조선혁명자후원회(朝鮮革命者後援會)가 조직되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27년 2월에는 ‘길림대검거사건(吉林大檢擧事件)’이 발생하자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등 중국 당국에 검거된 독립운동가 47명에 대한 옥바라지와 구명운동을 전개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1931년 10월 김동삼(金東三)이 하얼빈주재 일본 영사관에 체포되자 친척을 가장하여 면회하며, 김동삼이 신의주로 이송될 때에 맞춰 구출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이동 날짜가 갑자기 변경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1932년 9월 일제의 만주침략에 대한 불법성을 조사하기 위한 국제연맹조사단이 하얼빈에 도착하자 왼쪽 무명지 2마디를 자르고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냈다.

1933년 2월 29일 이춘기(李春基) 등과 함께 만주국 일본전권대사 무등신의(武藤信義)를 처단하기 위해 권총 1정과 폭탄을 품고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던 중 미행하던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투옥된 후 1933년 8월 죽기를 각오하고 단식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단식 9일 만에 병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8월 22일 사망하였다. 영결식은 하루 뒤인 23일에 있었고, 유해는 하얼빈 교외의 남강(南崗)의 외인(外人) 묘지에 묻혔다.

[묘소]

남자현의 유해는 하얼빈의 남강(南崗) 공동묘지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나, 1958년 하얼빈시 ‘도시건설 대약진’ 때 이 외인 묘지가 하얼빈 동부의 황산신묘지(黃山新墓地)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남자현의 묘는 행방이 묘연하게 되었다. 1967년 6월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묘소가 조성되었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남자현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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