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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1004
한자 古代
영어의미역 Ancient Time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시대 선사/석기,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차용걸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이루어진 선사시대부터 고려왕조의 통일 이전까지의 역사.

[개설]

역사상의 고대라는 개념은 서양의 역사시대 구분을 원용한 것으로, 고대 노예제사회 혹은 엄격한 신분제사회의 성립과 해체를 기준으로 설정되었다. 여기에서 문자기록 이전의 시기는 선사시대로, 문자기록 이후는 역사시대로 구분하는데, 고대라는 개념 속에는 선사시대를 포함하여 신분계층사회의 성립 과정과 고대적 사회체제의 해체까지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는 고대가 선사시대를 포함하여 대략 10세기 전반까지로, 고려왕조 이후는 중세의 역사로 구분하고 있다.

경제사적으로는 채집경제로부터 생산경제로의 전환과 금속문명에 의한 국가의 성립과 보다 큰 규모의 국가로 통합되어지는 시기까지이다. 사회사적으로서는 빈부격차의 심화에 따른 사회적 계층의 발생과 신분제도로서의 왕족을 포함한 귀족, 대부분의 농민인 자유민, 노비를 포함한 천민 등 크게 세 계층으로 신분제도가 고정되어 율령체제 사회가 성립되었다가 신분제의 붕괴가 촉진되는 단계까지를 의미한다. 이 시기에 대한 자료는 주로 고고학적 자료에 의존하며, 기본적인 사료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있고, 기타 금석문(金石文) 등에 의존하여 알아볼 수 있다.

[선사시대]

보통 선사시대 유적지는 주로 강가에 발달한 한데유적이나 동굴유적인 데 반하여 음성 지역에서는 한강의 최상류 산간분지인 삼성면 용성리에서 선사시대의 생활터전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음성읍 지역보다 북쪽에 위치한 청미천 유역에서 신석기시대의 집터가 조사된 바 있으므로 정착생활의 시작은 장호원 지역이 앞섰을 가능성이 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삼성면 양덕리윗대실, 소이면 갑산리 등지에 고인돌이 분포하고, 원남면 상노리보룡리 등지에서 간석기가 출토되었다. 집터는 음성읍 하당리에서 6기가 조사된 것으로 미루어, 하천 유역의 낮은 구릉지역과 충적평야에 퍼져 살면서 소규모의 읍락(邑落)을 이루며 살았다고 여겨진다. 청동기시대 이후 청동 제품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아 뚜렷한 지역 세력이 상주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삼한시대]

대체로 이웃한 지역과 비슷한 시기인 서력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3세기 중반까지 마한(馬韓)의 여러 나라 이름이 중국측의 기록에 전해 오지만, 이 가운데 음성을 중심으로 성장한 나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대략 한강 유역에서 한반도의 중·남부 서쪽 지역은 진국(辰國)과 마한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므로 음성 지역도 마한에 소속된 지역이었다고 여겨진다.

[삼국시대]

한강 유역에서 백제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압도하고 점차 세력을 키워 한강 유역을 지배하게 된 시기가 3세기 후반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당시 음성 지역은 백제에 소속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와 관련한 고고학적 증거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웃한 충주 지역과 금강 유역의 청주·진천 지역 등에서 알려진 자료를 종합하면, 5세기 후반 고구려의 세력이 커져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는 시기 이전에는 소백산맥 북쪽 지역은 백제의 영향권에 속했다고 추정된다.

이와 관련한 고고학적 흔적으로는 음성 망이산성과 거기에서 발견된 철제 단갑(短甲)을 비롯한 유물들이 있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이 남진정책의 하나로 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다. 그리고 475년(장수왕 63)에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개로왕을 참살하여, 결국 백제의 도읍을 웅천(공주)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후 보다 적극적인 남진정책으로 한강 전 유역을 포함하여 역역을 크게 남쪽으로 확대하였다. 이때 충청북도 북부 지역은 고구려에 장악되었는데, 음성도 진천과 도안, 괴산, 연풍, 충주, 제천 등과 함께 여기에 포함된다. 이후 음성을 포함한 충청북도 지역은 삼국의 분쟁 중심지로서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백제와 신라는 동맹까지 맺으면서 고구려에 대항하여, 마침내 551년 전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 세력을 물리치게 된다.

백제의 성왕은 정월에 신라와 가야의 군사를 이끌고 한강 하류역의 6개 군을 장악하였으며, 3월 이후 신라의 진흥왕거칠부(居柒夫)구진(仇珍) 등 여덟 명의 장군을 한강 상류역으로 진출하게 하여 죽령 이북 철령 이남의 10개 군을 차지하였다. 이 작전으로 충청북도 북부 지역은 새로운 신라의 영유로 변하게 되었으며, 음성 지역 역시 이 무렵 신라에 예속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676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갑자기 늘어난 영토와 인구를 통치하고 관리하기 위하여 보다 정비된 정치제도를 필요로 하였다. 이에 따라 중앙의 정치기구도 확대 개편하고 지방의 행정구역도 재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685년(신문왕 5)에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마련하고, 주 밑에 군을 두고 그 밑에 현을 설치하였다.

경덕왕 때 충청북도 지역은 5개 주의 일부와 중원경·서원경의 2개 소경과 9개의 군에 13개 현으로 구성되었는데, 음성은 한주(漢州)에 속한 흑양군(진천)의 영현으로서 이때 잉홀(仍忽)에서 한자식으로 고쳐 음성현으로 개칭되었다. 음성 지역의 처음 이름인 잉홀을 『삼국사기』지리지에서는 본래 고구려의 땅이라 하고, 『고려사(高麗史)』지리지 이후로는 한강 이남이 본래 백제 땅이라고 못박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백제-고구려-신라의 순서로 영유한 국가는 바뀌면서 땅이름 자체는 지속적으로 사용된 듯하다.

[의의와 평가]

고대의 유적은 계속해서 발견, 조사될 가능성이 크다. 신석기시대와 청동기 유적지의 발견은 하천 유역을 중심으로 점차 늘어날 전망이며, 지역 정치체의 성장과 관련한 초기 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 백제와 고구려의 관련 유적도 현재 알려진 여러 유적의 조사가 진전되면 보다 확실해질 전망이다. 신라의 고분이 이미 조사된 바 있으며, 고대 문화유적의 증가는 이 지역 고대사의 해명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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