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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로부터 마을을 지켜온 수호신 음성 마송리 석장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2313
영어의미역 Stone guardians in Masong-ri that protected the village since time immemorial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
집필자 이상주

[개설]

장승은 마을 입구나 동제구역(洞祭區域)에 세운 마을 장승과 사찰 입구에 세운 사찰 장승, 그리고 지역 간의 경계로 삼거나 성문이나 병영(兵營)·해창(海倉)·관로(官路) 등에 세운 공공 장승으로 구분할 수 있다. 경계표나 이정표로 삼기 위해 세우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역질을 막고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 수호의 성격이 강하다. 이 때문에 오랜 옛날부터 마을의 흉액을 밖으로 몰아내기 위하여 동제로서 장승제를 행하였으며, 때로는 개인의 소원성취를 비는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렇듯 장승은 엄연한 신앙의 대상이었기에 신성시하며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마송리 석장승의 유래]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 오미에는 3기의 석장승이 전해 온다. 2002년 3월 15일 충청북도민속자료 제12호로 지정된 마송리 석장승들은 지금으로부터 3백여 년 전에 세워진 것들이다. 청주고씨 집성촌이기도 한 오미 사람들에 따르면, 1712년 이 마을 출신 고중명(高重明)[1681~1765]이 무과에 합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는 고중명이 무과에 합격한 해로부터 정확히 280년 전 윗대 조상인 고덕수(高德秀)가 1432년(세종 14) 식년시(式年試)에 진사(進士) 4위로 합격하고, 그후 15년 뒤인 1447년(세종 29)에 고덕칭(高德稱)이 식년시 정과(丁科)에 15위로 합격한 후 처음 맞는 경사였기에 이를 경축하고 기념하며, 자손 대대로 귀감으로 삼게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송리 석장승의 고향 오미]

석장승이 서 있는 마송리 오미의 ‘오미’는 오산(梧山)의 우리말 표기이다. 원래는 오뫼였는데 활음(滑音) 현상으로 오미가 된 것이다. 이는 증산(甑山)을 시리뫼로 부르다가 시리미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예전에는 동네의 형국이 새우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오(鰲)’를 썼는데, 이 오(鰲) 자는 자라 오(鼇)의 속자이나 오미에서는 새우 오로 알고 썼다고 한다. 마을 입구의 야트막한 언덕, 즉 숭덕사와 법화사가 자리한 곳을 새우의 꼬리로 본다. 일제강점기 때 글자가 복잡하다 하여 오동나무 오(梧)를 써서 오산(梧山)으로 바꾸었다.

오미오대산에서 발원하는 ‘말개울’과 보덕산에서 발원하는 ‘뒷개울’이 합치는 합수머리에 자리잡고 있다. 멀리 사방으로 꽤 높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고 뒷산이 완경사로 내려오는데, 그 기슭 끝 평지나 다름없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 마을이 안정감이 있고 평화로워 보인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의 개천에는 민물새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씨가 말랐다고 한다.

[마송리 석장승은 어디에 있나]

오미 석장승들은 얼마 전 오미 앞을 흐르는 청계천, 일명 말개울 가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옮겨 세웠다. 1호 장승(미륵형 장승)은 다리에서 10m 떨어진 냇둑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기서 100m 간격으로 2호 장승(문관석형 장승)과 3호 장승(선돌형 장승)이 세워져 있다.

1호 장승(미륵형 장승)은 원래 음성으로 넘어가는 길목, 곧 마송교 바로 건너쪽 방앗간 뒤에 있던 것을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미륵형 장승을 세운 이유는 미륵세계가 전개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것으로 생각된다. 2호 장승(문관석형 장승)은 현재 위치보다 30m 가량 안쪽의 옥현과 텃골로 가는 길목에 세워져 있었다. 후손 중에 벼슬하는 사람이 많이 배출되기를 기원하며 세운 장승으로 보인다.

3호 장승(선돌형)은 얼굴 없는 장승으로, 원래는 원남면 마송리 714번지인 역전 근처 길가에 있었다. 이 길은 백마산 쪽, 즉 음성군의 송오리를 거쳐 괴산군의 송오리로 가는 길목이다. 질병이 없고 전쟁이 없는 태평성대가 유지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靜界大將軍(정계대장군)’이라는 글씨에 담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마송리 석장승들의 본래 위치로 볼 때, 고중명의 과거 합격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석장승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여기에는 석장승으로써 마을의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마을에 안정과 번창을 가져다 주는 일종의 수호신으로서의 기능까지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볼 때, 석장승과 같은 상징물이 마을을 보호해 주고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을 갖게 되면 사람들은 매사에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결국 마송리 석장승은 각종 재앙으로부터 심리적 안정감과 위안을 주는 수호신이요, 동민들을 화합 단결하게 하는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송리 석장승은 어떤 모습일까]

1호 장승(미륵형 장승)은 높이가 240㎝인데, 그중 약 80㎝가 얼굴이다. 앞면 너비는 40㎝ 정도이다. 얼굴은 장방형으로, 머리에는 관음보살과 같은 관을 쓴 듯하며, 이마에는 백호가 표시되어 있다. 눈썹은 거의 한일(一) 자이며, 눈은 눈망울이 매우 크며 앞으로 불룩 튀어나왔다.

오른쪽 귀는 약간 위쪽으로 붙어 있는 반면 왼쪽 귀는 아래로 처져 있다. 인중이 매우 넓으며, 입은 약간 반달형으로 다물고 있다. 턱밑을 깊숙이 들여 파내어 윤곽이 뚜렷하다. 손은 분명하지는 않으나 마치 앞으로 두 팔을 모아 팔짱을 끼고 있는 것 같다. 몸통 부분에 명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마모가 심하여 정확하지는 않다. 다른 장승과 마찬가지로 ‘靜界大將軍(정계대장군)’이라는 명문을 새겨 놓은 것으로 추측된다. 배 중앙 부분과 다리 부분에 깊게 파인 구멍이 나 있는데, 6·25전쟁 때 미군의 총에 맞은 자국이라고 전한다.

2호 장승(문관석형 장승)의 높이는 260㎝이며, 앞면 너비는 50㎝ 정도이다. 1호 장승보다 키가 더 훤칠하다. 2호 장승은 문관석 형태의 장승으로, 귀밑으로 이어지는 얼굴선이 달걀형으로 유연하여 표정이 순수하고 밝아 보인다. 눈 위의 머리(이마) 부분이 얼굴에 비해 길고 머리에는 사모를 착용한 모습이다. 왼쪽 눈썹은 반달형이며, 오른쪽 눈썹은 오랜 세월 마모되어 희미하다. 두 귀는 눈 위쪽에 나란히 붙어 있고, 두 손을 깍지 끼고 있다.

전형적인 양반 복장의 하나인 소매자락이 길게 늘어진 도포를 입고 있다. 눈은 크고 앞쪽으로 튀어나오게 생겼는데, 뭔가 반짝이는 생각이 떠올라 기분 좋아하는 표정이다. 입은 반달형으로 다물고 있으며 살며시 웃는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기품 있고 후덕한 양반풍이 넘치며, 인자하고 포용력이 있어 보인다. 배꼽 아래쪽으로 ‘靜界大將軍(정계대장군)’이라고 새긴 명문이 선명하다. 정계대장군은 “안정된 세계를 만들어 주는 대장군”이라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3호 장승(선돌형 장승)의 높이는 220㎝이고, 너비는 50㎝이다. 얼핏 보면 광개토왕비를 연상케 하나 폭이 좁다. 직육면체의 자연석으로, ‘정(靜)’ 자가 끝나는 오른쪽부터 아래쪽이 그 위보다 넓어서, 마치 사람의 어깨선처럼 보인다. 목 부위쯤 되는 높이에서 몸통 아래쪽으로 ‘정계대장군(靜界大將軍)’이라고 음각했다. 그 바로 옆쪽에 ‘신묘 정월 일(辛卯 正月 日)’이라는 명문이 있다.

[오미 장승제]

오미 장승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오전 10시경에 지낸다. 제의는 각 장승마다 한 명의 헌관과 두 명의 집사가 맡아서 진행하는데, 3기의 장승에서 동시에 올린다. 제사 비용은 마을 기금으로 충당한다. 제수를 진설할 때는 맨 첫째줄에 백설기 시루를 놓고, 그 위에 껍질을 벗기지 않은 북어를 올려놓는다. 이때 북어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향하게 한다. 둘째 줄에는 감·대추·껍질을 까지 않은 밤을 올려놓고, 셋째줄에는 막걸리를 놓는다.

제사 절차는 보통의 기제사와 같이 제관이 먼저 분향하고 재배를 한 다음, 술을 따라 놓고 축문을 읽은 뒤 다시 재배를 하면 끝난다. 이때는 제관과 집사가 함께 절한다. 옛날에는 두루마기 차림으로 예를 갖추었지만 지금은 평상복 차림으로 제사를 지낸다. 축문은 다음과 같다.

“한 해의 차례가 정월 삭(朔)이 됨에, 유학 고○○는 백번 절하며 감히 오산(梧山)의 정계대장군 높으신 신령님께 고하나이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우리 마을에 재앙을 소진해 주시고, 나쁜 전염병과 흉칙한 질병으로부터 그 재앙을 물리쳐 주시고, 독 있는 벌레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그 해를 멀리 가게 해주시고, 모든 요사스럽고 더러움을 행랑채가 깨끗한 것처럼 사그라지게 해주시고, 길하고 상서로운 일이 몰려들게 해주시고, 부모님이 학처럼 장수하게 해주시고, 자손이 메뚜기처럼 많게 해주시고, 선비는 구름사다리에 올라가게 해주시고, 농부는 노적가리에 올라가게 해주시고, 술에 목욕하고 떡을 나누어 먹게 해주시고, 먹고 마시며 노래 부르게 해주시고, 고기를 뜯어먹고 물고기를 잡아먹게 해주시고, 배를 두드리며 춤추게 해주시어 무한한 세월 동안 태평하고 편안하게 지나게 해주소서. 이에 감히 백번 절하며 축원하나이다.(維歲次 正月朔日 幼學 高○○ 百拜敢告于 梧山淨界大將軍尊神 伏以本里 災殃消盡 惡癘凶瘟 乃攘其禍 毒蟲猛獸 乃遠其害 諸般妖穢 廊淸如消 吉祥輻輳 父母鶴壽 子孫螽蟄 士躡雲梯 農登露積 浴酒投餠 含哺而歌 齧肉啖魚 鼓腹而舞 無限年 太平安過 玆敢百拜祝願)”

[마송리 석장승에 새긴 마음]

마송리 오미 석장승은 오미의 역사와 주민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증인이다. 오미에서 출생한 고중명이 과거에 합격한 것을 경축하고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조형물이자, 동시에 마을 사람들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세운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마송리 석장승은 한 시대 주민들의 삶과 마음을 자연물에 표상화한 것으로서,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삶 자체가 문화임을 인식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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