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2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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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東地圖廣州府- |
분야 |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소현수 |
작성 시기/일시 | 1750년대로 추정 - 『해동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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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08년 12월 22일 - 보물 제1591호 |
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 |
성격 | 고지도 |
관련 인물 | 정상기(鄭尙驥) |
문화재 지정 번호 | 보물 |
[정의]
175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동지도(海東地圖)』에 수록된 「광주부(廣州府)」 지도.
[개설]
『해동지도』로 묶인 지도집에는 「조선전도」, 「도별도」, 「군현지도」 뿐만 아니라 「세계지도」, 「관방지도」 등이 망라되어 있다. 국가 차원에서 제작된 방대한 분량의 채색 필사본 회화식 지도이며, 지도에 지리지를 결합하고 있어서 우리나라 군현 지도집을 대표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해동지도』는 정상기(鄭尙驥)가 제작한 『동국지도(東國地圖)』의 원도(原圖) 계열을 따르는 사본 지도의 성격을 지닌다. 또한 후대 모사본(模寫本)일수록 전사자(傳寫子)가 내용을 보완·수정하였기 때문에 『해동지도』는 규장각에 소장된 『팔도지도(八道地圖)』 보다 풍부한 지지(地誌)적 정보가 담겨져 있다. 또한 『해동지도』가 지도를 중심으로 지리지를 결합한 측면이 강한 반면, 영조대 후반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는 지리지를 중심으로 하고 지도를 부도(附圖)로 활용한 책자이다. 서울특별시 강남구와 관련하여 총 8장의 분도(分圖) 중 「경기도·충청도」 지도와 「광주부」 지도가 있다.
[제작 발급 경위]
『해동지도』는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데 활용되었던 관찬(官撰) 군현 지도집의 성격을 가진다. 숙종 때 지역을 효과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비변사 내에 각 도별 전담자를 두자는 팔도구관당상제(八道句管堂上制)가 시도되고, 1730년대에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다. 이러한 목적에서 비변사에서는 초기의 회화식 군현 지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 1740년대 후반부터 1리 방안으로 된 기호식 군현지도집을 편찬하였다. 『해동지도』에는 지도 부분이 오려붙여진 흔적이 있는데, 여기 쓰인 원본 지도가 초기 비변사 지도와 동일하다. 즉, 『해동지도』는 영조 대에 비변사와 함께 지도 및 지리지 제작에 참여하였던 홍문관이 주도하여 초기 비변사 지도를 바탕으로 하고 1리 방안 형식을 가진 후기 비변사 지도를 참고하여 편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해동지도』 제8책의 「팔도총도(八道總圖)」와 제4책의 「서북피아양계전도(西北彼我兩界全圖)」는 회화식 대형 전도이며, 나머지 대부분의 지도들은 도지도, 도별 군현지도, 도내 군사적 요충지의 지도 순으로 편집되어 있다. 「광주부」 지도는 47.5×30.0㎝ 규모의 채색 필사본 지도이다.
[구성/내용]
팔도구관당상제가 도별 지역 파악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같은 도 안에서 작성된 지도에서는 지형지물의 표시 방향, 산계·수계의 표시에서 통일성을 보이지만, 도별로는 표현한 내용과 방식에 편차가 있다. 총 8장의 분도(分圖) 중에서 「경기도·충청도」 지도에는 현재 행정구역상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군사분계선 근처에 있는 황해북도의 개성시, 장단군, 연천군, 남한의 경기도와 충청도가 포함된다. 지도에 경기도 금천(衿川)이 시흥(始興)으로 표기되고 충청도 노성(魯城)이 표기된 것으로 보아 1800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함경도 후주부(厚州府)가 1822년에 설치되는데 표시가 없는 것을 통해서 1822년 이전에 그려졌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와 같이 지도의 제작 시기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지명의 변천뿐만 아니라 산, 강 등의 자연적 요소에 대한 표현과 도로, 진보(鎭堡), 역참(驛站), 산성(山城), 능원(陵園) 등의 인문적 요소 그리고 지도 여백에 적힌 주기(註記)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야 한다.
각 주군(州郡)의 여백에 소속면수(所屬面數)와 거리 정보를 기재하였는데, 이것은 김정호의 『청구도(靑邱圖)』에서 볼 수 있다. 발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도로는 백리척(百里尺)을 도입하여 평탄한 곳에서는 100리를 1척으로 표시하고, 산협(山峽)이나 수곡우회처(水曲迂廻處)에서는 1척을 1백 2, 30리로 표시하였다. 즉, 산지에서의 이수(里數)는 직선거리로 고쳐서 지도에 표시하였다. 후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모두 직선화하여 10리마다 점을 찍어 두 지역 간 거리를 추정하도록 하는데 기여했을 가능성도 크다.
한강변에 위치한 경도(京都)[서울의 별칭]는 500여 년간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교통의 중심지였으므로 상대적으로 크게 표시하였다. 한성 주변의 풍수적 명당 형국에는 창릉(昌陵), 명릉(明陵) 등 조선 시대의 능이 들어서 있다. 왕족의 무덤인 능은 조선의 정통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전통시대의 지리지나 지도에 필수적으로 수록되는 정보이다. 조선 시대에 한강은 장거리 물자 수송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한성부 아래쪽의 한강을 경강(京江)이라고 불렀으며, 경강은 수도인 한성을 배후지로 하여 상업이 가장 발달한 지역이었다.
『해동지도』 「광주부」 지도의 영역은 현재의 경기도 광주군, 하남시, 성남시, 의왕시, 군포시 일대와 화성군 매송면 일부 지역[원리, 송라리, 야목리 등], 안산시 일부 지역[일동, 이동, 본오동, 성포동], 서울특별시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일부 지역, 남양주시 와부읍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남한산성 안의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가 1917년까지 광주부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지도에서 남한산성의 문과 장대(將臺), 옹성(甕城)의 위치를 자세히 묘사되었으며, 성곽 안의 건물들과 사찰을 표시하고 있다. 서울의 남동쪽, 한강 이남에 위치한 곳으로써 지도 위쪽이 서쪽이다. 수운(水運)이 주요한 역할을 하는 지역이었으므로 송파진(松坡津), 삼전도(三田渡), 광진(廣津), 용진(龍津) 등의 나루가 한강변에 적혀있다. 지도를 통해서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부산으로 가는 대로상에 있는 지역의 특성상 지금의 강남구 양재역(良才驛)과 함께 경안역(慶安驛), 봉안역(奉安驛), 낙생역(樂生驛), 사평원(沙平院), 도미원(渡迷院), 광진원(廣津院) 등의 역원과 주막이 표기되었다. 또한 이 지역의 사찰과 암자를 지도에 자세히 표시하고 있다.
『해동지도』 이후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여지도』와 『광여도(廣輿圖)』의 「광주부」 지도에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강, 탄천, 양재천의 수계가 강남구 일대의 영역을 한정하는 경계로 그려지고, 지금은 사라진 저자도와 무동도를 표기하였다. 또한 영남대로 상에서 거치게 되는 양재역(良才驛)이 자리 잡고, 봉은사(奉恩寺)와 선릉(宣陵) 및 정릉(靖陵)은 그림과 함께 묘사되었다. 그렇지만 『해동지도』에는 한강 건너편에서 양재역으로 가는 길과 봉은사로 가는 길로 구분된 두 갈래 길이 그려지고 장소 명칭 옆에 구체적인 거리가 적혀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의의와 평가]
『해동지도』를 포함하여 18세기 중후반을 중심으로 한 시기에 편찬된 지도들은 정보 제공이라는 지도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면서도 회화적 기법으로 묘사하여 시각적 아름다움을 겸비하는 수준을 달성하였다. 이것은 지도와 회화의 결합이 조선 후기에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당시 진경산수화의 발달과 병행하는 현상으로써 지도와 회화 양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해동지도』는 당시까지 제작된 모든 회화식 지도를 망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각 군현 지도마다 도로를 빼놓지 않고 그려 넣은 점은 『해동지도』가 지닌 큰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