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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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廣州留守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나각순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가 포함된 광주(廣州) 일대를 관할하였던 조선 후기 지방관청.
[개설]
광주 지방에는 조선 초기에 다른 지방과 같이 목사(牧使)를 두었으나 1577년(선조 10) 이를 부윤(府尹)으로 승격하였다. 1634년에는 광주 남한산성의 모든 군사행정은 수어청 수어사가 독자적으로 책임지게 하였다. 이렇게 군사책임자인 수어사가 있고 행정책임자인 광주부윤이 있는 이원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1652년(효종 3)에 광주부윤을 수어부사로 삼아 일원적 체제로 개편시켰다. 1682년(숙종 8) 광주부윤을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비변사 당상관으로 겸임하게 하고, 수어사의 책임을 맡게 함으로써 수어청이 단일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1690년에 광주유수의 질이 높아 재신(宰臣)의 경관직(京官職)으로 교체됨에 따라 군무가 소홀해지는 폐단으로 다시 이원화되었다. 그 뒤 1750년(영조 26) 국가 경비를 줄여보자는 뜻으로 그 해 7월에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이후 1759년(영조 35)까지 광주유수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1759년에는 유수가 자주 교체되어 군무(軍務)가 소홀해지는 폐단이 생김에 따라 다시 광주부로 개편되었다. 그 뒤 1795년(정조 19) 군제 개편을 단행하면서 수어경청(守禦京廳)을 폐지하고 다시 유수부로 승격시켜 유수가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하게 해 행정과 군정을 일원화하였으며, 그 체제는 1895년까지 유지되었다. 1795년 8월에는 광주부를 유수로 승격시켜 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고, 유수가 자주 교체되는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유수의 임기를 2년으로 정하였다. 이렇듯 지휘체계의 모순으로 수어사가 자주 교체되는 바람에 남한산성의 방어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광주유수부는 정2품 아문(衙門)으로 유수 2명을 두었는데, 그 중의 1명은 경기관찰사가 겸임하게 하였다. 유수부의 조직은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행정조직으로 유수 외에 경력[종4품] 1인, 도사 2인, 교수 1인을 두었다. 특히 경력은 낭관의 선임자로 6방 서리를 비롯한 수청서리 80명을 통솔하여 유수부의 행정을 실질상 처리하였다. 뒤에는 경력 대신 종5품의 판관을 두어 행정실무를 담당하게 하였으며, 종9품 검률을 두어 사업행정의 자문이나 실무를 맡게 하여 유수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유수부의 군사조직은 구 도읍인 개경[지금의 개성]의 행정만을 주관하던 유수가 세조 대에 진관제를 중심으로 군비를 강화하면서 군사업무도 부가되어 병마절도사의 직책을 겸임하였고, 양란(兩亂)과 내란을 겪으면서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군사적 기능이 더욱 강화되었다. 즉 인조 때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부터 더욱 중요시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광주 이외에 개성·강화·수원 등 수도방어에 중요한 지역에 이 유수를 설치하였다.
한편 1759년 호구장적에 나타난 광주유수부의 관할구역은 경안, 오포, 도척, 실촌, 초월, 퇴촌, 초부, 동부, 서부, 구천, 중대, 세촌, 돌마, 낙생, 대왕, 언주, 의곡, 왕륜, 일용, 월곡, 북방, 송동, 성곶면 등 총 23개면으로 편제되었다.
갑오경장 이후 조선의 1895년 지방행정구역체제가 23부와 339군의 2원적 체제로 개편되면서 광주유수부는 광주군으로 강격되어 한성부 관할이 되었다. 이듬해 광주부 광주군이 되었으며, 1906년에 경기도 광주군이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시대에는 당·송의 왕도 보위제(保衛制)를 본받아 왕도의 배도(陪都)로서 유수제를 채택하였다. 처음에는 구 왕족과 귀족에 대한 관리를 목적으로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성과 왕실의 본관인 전주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행정적 목적 이외에 군사적 목적과 왕도에 대한 호위기지로서의 목적으로 개성·강화·수원·광주에 4부 유수부를 설치 운영하였다.
유수의 임명은 그 직책의 중요성에 비추어 이조·병조·호조 판서 등의 요직 임명절차에 준하여 묘당회의에서 적임자를 천거하여 국왕이 낙점하는 절차에 따랐다.
[내용]
광주유수부는 한양 도성을 호위하는 방어체제의 강화로 경관(京官) 정2품으로 임명되어 각도의 관찰사와 같은 격으로 운영되었다. 광주부윤이 지방관이었던 것과는 달리 그 격이 매우 높아졌던 것이다. 반면 경관으로 자리가 자주 교체되는 폐단을 낳아 남한산성을 수호하는 수어청 수어사를 겸하는 군사행정의 안정성을 해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그리고 인조 때 유수부가 되어 유수와 부윤체제가 번복되면서 영조·정조 연간까지 한성 방위체제의 일환으로 남한산성에 치소를 두고 경영되었다. 이렇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군사적으로 중요성이 강조되어, 광주를 비롯한 강화·수원이 유수부로 승격되어 기존의 개성과 더불어 4도(四都) 체제를 갖추어 한양도성을 동서남북에서 호위하는 방위체제로 운영되었다. 개성유수와 강화유수가 종2품이었던 것에 비하여, 정2품의 광주유수는 한층 중요성이 강조된 것이었다. 갑오개혁에 따른 1895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으로 한성부 산하 광주군 또는 광주부 산하 광주군으로 개편되면서 한 단계 낮은 지방행정단위로 편제되었다.
[변천]
조선 전기 광주목을 계승하여 1577(선조 10년) 광주부(廣州府)로 승격되었다. 임진왜란과 효종의 북벌계획 추진에 따른 방위체제의 강화로 1623년(인조 1) 남한산성을 쌓은 뒤 1626년(인조 4년)에는 유수부로 승격되고 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되면서 읍치를 이곳에 옮겨 수도방어를 위한 특수 행정구역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에 다시 부로 승격되어 부윤을 두게 되었고 1683년(숙종 9년) 유수부(留守府)로 승격되었다. 1759년(영조 35년)에는 다시 광주부윤을 두었으며, 1795년(정조 19)에 다시 정2품아문 광주유수부로 승격되어 갑오개혁에 의해 광주군으로 개편되는 1895년까지 지속되었다.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에 의한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한성부 관할 광주군, 광주부 관할 광주군이 되었다가 급기야 경기도 광주군으로 변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광주목·광주부를 계승한 광주유수부는 한양도성을 제외하고 가장 큰 지방행정단위로 정2품 관리가 파견되어 운영되었다. 특히 전란과 내란을 겪은 뒤 수도방위체제를 위해 남한산성에 설치한 수어청 수어사를 겸하게 되어 그 중요성이 극대화 되었다. 이후 갑오개혁으로 일제에 의해 근대성을 띤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경기도 예하 하나의 군 단위 행정구역으로 낮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