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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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江陵邑城-江陵大都護府官衙遺蹟- |
영어의미역 | Walled Town of Gangneung and Gangneung Daedobu Government Office Sites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집필자 | 김흥술,증보:박석중 |
[정의]
강릉읍성은 근대 이전 고려와 조선시대에 강릉 지역의 치소(治所)가 위치했던 행정중심지에 조성되었던 성곽을 말하며, 관아 유적은 강릉읍성 내에 존재했던 치민을 위한 시설물을 일컫는다.
[개설]
-읍성을 보면 역사가 보인다. - 강릉읍성과 관아 유적
강릉은 지리적으로 한반도 중부의 동해안에 위치하며, 서·남·북으로 고도 약300~1,000m의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의 높은 산지에서 동해로 고도 100m 미만의 낮은 구릉이 뻗어 있다. 주변의 높은 산지는 풍화에 강한 사암 등으로 이루어졌고, 구릉지대는 화강암이 기반을 이루고 있다.
대관령과 왕산면 목계리 대화실산에서 발원하는 남대천은 시의 중심을 통과하여 견소동 하구를 통해 섬석천과 합류하여 동해로 유입되었으나 현재는 송정동 안목하구를 통해 동해에 이른다. 하천의 하류에는 비교적 넓은 충적지가 형성되며, 모래해안이 나타나며 이는 주문진까지 연속된다. 시의 서쪽은 평창·홍천군, 남쪽은 동해시, 북쪽은 양양군과 접하고 있다. 강릉의 동·서간 거리는 약 28㎞, 남·북간 거리는 약 60㎞, 해안선은 약 30.3㎞이다.
서쪽 동대산[1,434m], 대관령[해발 832m. 도로 기준], 노추산[1,322m] 등의 높은 산지가 분수령을 이루며 동해로 낮아지면서 이 사이에 북에서부터 신리천, 연곡천, 사천천, 섬석천, 남대천, 군선강, 주수천 등의 하천들이 있다. 동서의 단면이 해안선에서 서쪽 대관령으로 급속히 높아지고, 남북의 단면은 남쪽이 높고 중심부는 낮으며 다시 북쪽으로 높아진다.
이러한 자연지리적 환경으로 강릉은 서쪽으로 가는 교통망이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으며, 대신 영동 지역의 중심에 위치하여 남북으로 문화교류가 더 빈번하였다. 강릉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영동의 중심지로서 경상북도 동해안의 울진·평해와 평창군 봉평·용평·진부·도암면·정선군 임계면 등 광역생활권의 문화·행정·군사·경제 중심지였다.
강릉의 명칭은 고려시대에서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동원경, 하서부, 명주도독부, 명주목, 강릉대도호부 등으로 변화해왔다. 그 동안 현(縣)으로의 몇 차례 강등도 되었으나 곧 원상대로 복구되었다. 강릉은 고대국가에서부터 조선말기까지 정치, 행정,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지정학적 위치를 지켜온 것이다. 이런 역사는 강릉이라는 도시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려시대에 강릉은 먼저 동계 지역에 속하였다가 강릉도로 변경되었는데 대체로 변경에 속하면서 그 군사적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1389년(공양왕 1)에는 강릉부를 강릉대도호부로 승격하고 별칭으로 임영(臨瀛)이라 하였다. 이때부터 대도호부가 되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영동 지방을 총괄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같이 읍격(邑格)의 승강이 몇 차례 있었는데 1666년(현종 7) 강릉 지방에서 강상죄(綱常罪)가 발생하여 강릉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75(숙종 1) 대도호부로 환원되었고, 1782년(정조 6) 역신 이택징(李澤徵)의 출생지라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8년이 지나서 강릉부로 다시 상승되었다. 1895년 지방 행정 체계가 8도에서 23부 체제로 개편되면서 강릉부에 관찰사를 두고 강릉·울진·평해·삼척·고성·간성·통천·흡곡·양양군의 9군을 관장토록 하였다. 이듬해 1896년에 다시 13도체제로 개편되어 강릉군은 21개 면을 관장하게 되었다. 이후 1906년 임계면·도암면·대화면·진부면·봉평면·내면이 각각 정선·평창·홍천군으로 이관되면서 오늘과 같은 영역으로 고정되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전통 도시들이 옛 읍성에서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그 전통도시의 가장 중심이 되는 위치에 놓이는 건축물이 바로 관아다. 근대 이전 각 고을에 조성되었던 관아는 고대에서 근대를 지나 오늘에 이르는 동안 곧 도시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좁은 의미로 관아라고 하면 관아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읍성 공간 내에 조성된 치민을 위한 건조물들의 집합체를 말하고, 관아를 넓은 의미로 쓸 때는 읍성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를 포괄하는 개념이 된다.
관아는 그 시대의 민·관이 주체가 되어 조성하였으며 그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내재된 인공물이다. 건축물로서의 관아는 건축의 원리에서 엄격한 법칙성을 따르면서, 지배층의 입장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공간으로서 조성되었다.
고려시대의 관아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여 건물의 규모나 배치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관아건축은 중앙과 지방에 비교적 많은 유적이 남아 있었으나 일제시대에 정책적으로 또는 문화적 인식의 부족으로 대부분 헐려서 없어졌다. 다만 지역에 따라 동헌, 객사, 누관 등이 남아 있다. 강릉의 객사는 조선시대 관공서 건물로 1632년(인조 10)에 중건하고 1726년(영조 2)에 확장 중수되었으며, 일제 때 보통학교 설립으로 헐어지고 객사문만 남아있게 되었는데 칠사당도 도로 확충 등으로 원형의 손실을 가져왔다. 오늘날 관아는 그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며 과거 읍성 내에 있었던 관아 유적으로는 임영관지, 객사문, 칠사당 정도가 남아 있다.
-임영관지-
사적 제388호로 지정되어 있는 임영관[1994. 7. 11. 지정]은 강릉시 임영로131번길 6[용강동 58-1]에 있다. 이곳은 강릉부의 객사 건물인 임영관이 있었던 자리다. 객사는 지방으로 출장 온 중앙의 관리가 숙소로 이용하였던 곳이다. 또한, 왕권의 대행자였던 지방관인 강릉부사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왕이 계신 대궐을 향해 망궐례를 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임영관이 세워진 936년(고려 태조 19)에는 83칸에 이르는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하며, 기록을 통해 보면 그 후 수차례 보수 중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경주에 있던 조선 태조의 영정을 이곳 임영관지 내에 집경전을 건립하여 봉안하기도 했었다. 1628년 집경전에 모셨던 영정의 채색을 고친 일도 있으나 1631년 화재로 불탔고, 1633년 임영관을 다시 건립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보수 정비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일제시대 1929년 이 자리에 강릉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서기에 앞서 1927년경 객사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헐렸다.
당시 건물이 헐리게 되자 지역 주민들이 건물 목재의 일부를 매입하여 강릉 남산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7호인 강릉 오성정을 건립하였다. 현재 강릉 지역에 남아있는 정자 건물의 여러 곳에 객사 건물의 목재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객사 자리에는 1957년 경찰서가 건립되었다. 이후 경찰서가 이전하고 1993년 강릉시청사 부지로 검토되어 부지 정비 공사를 하다가 문화유적 긴급 수습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건물유구가 양호한 상태로 다양하게 확인되어 고려시대 이후 관아의 건물지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관아 유적 복원 정비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강릉원주대학교 박물관에서 1998년 발굴 조사를 했다. 그 결과 고려시대에서 조선후기에 이르는 시기의 전대청(殿大廳)·중대청(中大廳)·동대청(東大廳)·낭청방(廊廳房)·서헌(西軒)·월랑(月廊)·삼문(三門)[임영관을 구성했던 각 건물의 명칭이며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셨던 중심 건물이 전대청이다. 조선시대 강릉의 향토지인 『임영지(臨瀛志)』에 나타난 기록과 일치한다.] 등 많은 건물 터와 이른 시기 청자와 분청사기, 백자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암·수막새, 기와 등이 발견되었다.
발굴 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중기 이전의 건물 하부 구조가 잘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전통 객사 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발굴 조사를 통해 얻어진 자료를 바탕으로 임영관지에는 중대청이 2003년 복원되었고 전대청도 거의 복원되어 곧 완공을 앞두고 있다. 임영관의 정문인 객사문[국보 제51호]도 1999년부터 시작된 보수 정비 공사가 2004년 말 마무리되었다. 앞으로 이 임영관지와 연결되어 있는 구 명주동 시청사 부지인 관아지를 포함한 지역이 강릉관아 유적지구로서 지속적인 복원 정비 사업이 추진될 계획이다. 임영관지는 인접한 곳에 위치한 객사문 및 부사가 업무를 보던 칠사당(七事堂)과 함께, 옛 강릉의 관청 건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유적이다.
현재 임영관 복원 공사는 중대청·전대청 그리고 전대청 좌우의 동·서 익랑이 복원되었으며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객사였던 임영관은 그 자리와 기록, 흔적들만 남아있지만 그 객사의 정문이었던 객사문은 오늘날도 남아 있다. 세월의 무상함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강릉의 객사문은 국보 제51호로 지정되어 있다.[강릉시 용강동 58-1 소재. 1962. 12. 20. 지정]
조선시대에는 객사 건물 중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 정전(正殿)에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 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하여 절을 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 관리가 오면 여기서 묵게 하였다.
강릉 객사문은 고려 936년(태조 19)에 창건된 객사[중앙의 관리나 손님들이 오면 묵게 하던 여관 구실을 하던 곳]의 유물(遺物)이다. 현존하는 건물은 고려말기의 건축물로 생각되며 이 문에 걸려 있는 제액 글씨 ‘임영관’은 공민왕이 낙산사 등지로 행차하였을 때 쓴 친필이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확증은 없다. 1929년 일제시대에 객사는 공립보통학교로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문화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운동장 확장 공사라는 미명하에 본채 건물은 헐리게 되고 현재의 객사문만 남게 되었다.
객사문은 앞쪽이 비교적 높은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옆면과 뒷면에는 둥근 자연석을 배열하였으며 기초석은 동일한 형태의 돌이 아닌 몇 가지 다른 모양의 것을 이용하고 있다. 국보 51호 강릉 객사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14.67m×4.65m]이며 안쪽기둥 높이[고주] 3.28m, 주심도리[고주와 고주 위에 가로로 놓이는 부재] 높이 4.13m, 처마깊이 2.21m, 총 건물높이 6.89m, 맞배지붕[지붕면이 2개로 마주 보고 있는 형식]이며 지붕은 약간 귀솟음[지붕의 양쪽이 위로 높게 된 형식]을 보인다. 정면 3칸에 커다란 판자문을 달고 있으며 막돌 초석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중앙 대문짝을 닫게 된 기둥은 방주로 처리하였다. 앞 뒷줄 기둥은 배흘림이 뚜렷한 원주를 사용하였고, 중간 줄의 기둥은 방주(方柱)[네모난 기둥]를 사용하여 문을 달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아주 오래된 인상을 주며 장식화 경향이 심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객사문은 강원도 내 건축물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로, 간결하고 소박한 주심포계[기둥 위의 복잡한 부재가 기둥위에만 있는 오래된 양식] 형식을 취하고 있는 맞배지붕의 삼문(三門)이다. 기둥의 배흘림은 현재 남아 있는 목조 건축 문화재 중 가장 크며,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에 사용된 공포의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말기, 조선초기 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칠사당-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는 칠사당[1971. 12. 16. 지정] 역시 관아의 부속건물이다[강릉시 경강로 2045[명주동 38-1]]. ‘칠사(七事)’는 조선시대 수령이 향촌을 다스림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곱 가지 일(守令七事)을 말한다. 농업생산의 증대[농업], 인구 증가를 위한 정책시행[인구], 교육진흥[교육], 공정한 재판으로 민생 도모[사법], 군정의 엄정한 시행[병무], 백성의 부역의 균등[세무], 사회 풍속을 정화하는 것이 칠사다.
강릉 칠사당은 1632년(인조 10)에 중건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867년(고종 4) 화재에 의해 불탄 것을 부사 조명하가 새로 지은 것이다. 건물의 평면은 ㄱ자형의 건물로 정면 좌측에 높은 마루가 있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건축물로 측면 1칸은 퇴칸[벽이 없이 기둥만으로 이루어진 칸]으로 하였다.
기둥의 둥근 주춧돌은 전면[63㎝]의 것이 제일 높고 그 외의 기둥들은 높이가 각각 차이를 두고 있다. 누마루 부분의 네 기둥과 퇴주[벽이 없는 만들어진 기둥]는 원주로 되어 있고 공포두 개의 익공 형식이다. 겹처마 팔작기와 지붕으로 되어 있고, 3면에 3분합[3분의 1 공간에 문을 만듦] 띠살문을 달고 마루의 연결 부분에 다락방을 두고 있다.
본채의 좌측은 온돌방이고, 기둥 사이에는 쌍분합 띠살문을 달았다. 중앙에 대청마루가 있고 우측 온돌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아 대청마루와 높이를 달리하면서 연결시키고 있다. 대청의 천장은 우물천장+연등천장으로 되어 있고 벽체는 회벽 마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수비대가 사용하였고, 그 후에는 강릉군수 및 강릉시장의 관사로 1958년까지 사용되었다
객사 건물이 ‘강릉’이라는 도시의 중심을 이루었다면, 읍성(邑城)은 강릉의 외곽을 한정하는 경계선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읍성이라 하면 지방행정의 중심지인 치소지(治所地)에 축조한 성곽을 말하는데 조선 전기에는 110~123개의 읍성이 유지되었다. 상비군에 의한 충분한 지역 방어가 어려웠던 시대였던 만큼 불시에 닥치는 외침으로부터 주민의 생명은 물론, 지방관아의 각종행정자료와 물품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읍성이 필요했다. 강원도의 경우에는 왜구나 야인의 침입이 있었던 동해안에 읍성의 필요성이 더 컸다. 읍성은 고대 군사적 요새에서 비롯되어 행정적 기능이 강화된 고려시대부터 나타났다. 조선 초기 읍성은 대부분 토성인 상태였으므로 외침에 대하여는 취약했는데, 임진왜란을 계기로 방어시설로서의 읍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낮아졌다. 강원도 지역에는 조선시대 읍성이래야 강릉, 삼척, 양양, 고성 등 해안지역에만 있는 정도였다.
치소가 있던 강릉읍성은 세 시기의 역사적 변천을 거친다. 고대 예국고성은 현재의 옥천동 일원에 있었으며, 통일신라 말기 명주성은 성산면 금산리에 있었고,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강릉읍성은 지금의 명주동·성내동을 중심으로 위치했다.
-예국고성-
예국고성(濊國古城)은 강릉 지역에서 가장 오랜 성곽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의 강릉시 옥천동과 포남동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서 금학동·성남동의 일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현재 시가지로 변하여 동부시장, 중앙시장, 금학시장 등이 오거리를 중심으로 밀집해 있는 교통요지이며 철로가 남북으로 가로 질러 있고 남쪽으로는 남대천 제방과 접해 있다.
강릉[명주]은 본시 예(濊)의 고도로 철국(鐵國) 혹은 예국(濊國)이라고도 하였으며 고구려의 하서량(何西良)이었다가 후에 신라에 속하였다. 639년(선덕왕 8) 2월 하슬라주에 북소경을 만들고 사신을 두었다. 658년(무열왕 5) 3월 이 지역이 말갈에 연접하였으므로 경을 파하고 주를 만들어 군주[도독(都督)]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757년(경덕왕 16) 12월 전국에 9주를 설치할 때 ‘명주’라 명칭을 바꿔 지금도 그대로 영현이 넷이라고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이곳의 방어와 주민 보호를 위해 쌓은 성이 예국고성이다. 신라말기 김주원(金周元)이 강릉에 올 때 이미 본성은 존재했을 것이며, 넓게 트인 들과 남대천을 끼고 있는 옛 도읍으로 이미 당시에 이 지역의 행정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국고성은 지리지마다 대부분 ‘예국고성’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데 ‘읍토성’, ‘고성’이라 칭하는 기록도 있다. 이 성은 읍성 동쪽에 있는 토성으로 둘레가 3,480~3,484척이라 했다. 1481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이미 폐하였다고 나오고, 이후 계속 고성의 ‘고(古)’가 붙은 형태로 기록에 남아 있다. 『임영지(臨瀛志)』,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 등 기록들이 대부분 예국고성은 시내 관문 동쪽에 있고 토축의 둘레가 3,484척이며 지금은 없어졌다고 하였다.
예국고성은 강릉읍성이 축조되면서부터 존재가치가 없어졌다.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강릉 지역의 관아 유적인 고성은 조선후기까지는 토성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1900년대부터 급속히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시가지로 변하여 흔적조차 확인할 수 없다. 1920년경 만들어진 지적도를 통하여 대략적인 윤곽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다. 이 지적도를 살펴보면 동벽 위치가 되는 옥천동과 경계를 이루는 포남동 916-1번지부터 916-13번지까지 지목이 ‘성(城)’으로 표기되어 있고, 남벽 위치가 되는 옥천동 47-1, 47-2번지의 남대천 변과 옥천동 47-15번지, 그리고 서벽 위치인 옥천동 197-3번지에 ‘성’이란 지목이 표기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강릉여자고등학교 동측 도로, 남대천 북안 강변로, 옥천동과 성남동, 금학동, 임당동, 교동이 경계를 이루는 지역으로서, 현 옥천동 지역 전체가 예국고성의 범주로 추정된다. 이 지적도를 근거로 예국고성의 추정 복원도를 만들면, 현재 남대천을 가로질러 시내를 관통하는 철길 중 남대천에서 구 터미널사거리에 이르는 높이 3~6m, 폭 상부 4~5m, 하부 10m 정도의 시가지보다 높게 축조된 토축 부분이 예국고성의 서벽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예국고성은 유사 이래 강릉 최초의 읍치지로 추정되지만 현재로서는 자세한 사항을 규명할 수 없고, 도시 발달로 훼손이 극심하여 고고학적 규명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강릉 지역의 고대사를 알기 위해서는 예국고성의 역사적 성격을 밝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명주성-
두 번째 시기의 성인 명주성(溟州城)은 성산면 금산리 산 7번지에 위치하는 토석혼축성으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명주성이 있는 성산면 금산리는 자연부락 장안동, 제동, 성하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남으로 남대천이 연접해 있다. 동쪽에 홍제동, 서쪽에는 구산리·관음리, 북쪽에 위촌리와 접하고 있다. 금산리는 해발 158.5m의 정봉의 서쪽에 제동마을과 구동마을이 있으며 동쪽으로 해발 100m 내외의 구릉을 따라 명주성이 있고 이 성을 끼고 동남쪽 마을이 장안동이고 성의 북쪽 아래에 성하(城下)마을이 있다.
성의 동쪽으로 낮은 곳에 영동전문대학이 있으며 장안동마을 입구에 ‘명주군왕고도기념비’가 있다. 마을의 자연부락명을 살펴보아도 명주군왕 김주원이 이곳에 도읍을 정한 것으로 짐작되며 그 시기를 전후해서 성이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 명주성과 관련한 인물을 든다면 당연히 김주원을 들 수 있는데 여러 기록들이 왕위 경쟁에서 밀려 강릉으로 온 것을 말하고 있다.
신라 무열왕의 후손인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군신들이 진의태후의 명을 받들어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상대등 김경신이 먼저 입궁하여 왕위에 올랐다. 신라 757년(경덕왕 16)에 9주 군현을 설치하면서 하서주는 명주로 개명되었다. 786년(원성왕 2) 김주원은 왕위 계승 경쟁에서 상대등 김경신[원성왕] 세력에 의해 밀려나 중앙에 거주하지 못하고 명주에 오게 된다.
명주 지역에는 원래 김주원의 장원이 있었고 이와 연결된 친족 공동 세력이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김주원은 중앙과 대립하는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런 연유로 김주원은 ‘명주군왕’이라고 칭해졌으며 그 뒤 명주도독은 대대로 김주원의 직계손들에 의해 세습되었다. 반-독립적인 김주원 세력은 신라 말기까지 유지되고 있었으며 후삼국시대 명주 호족의 대표격인 김순식도 이에 속한다.
김주원이 강릉에 오기 전에 이미 이 지역을 중심으로 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김주원이 이곳에 오면서 명주성은 고성에서 울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관할하던 고읍성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향토 기록에 보면 성은 강릉부 서쪽 10리 되는 곳에 있었으며,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3,000보나 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지방을 분할하여 9주를 설치할 때 하서부를 명주로 개명하였는데 영해의 큰 도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읍 사람들 중, 명주성의 옛터가 어디인지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전하는 말에 명주성이 경포에 있었다고도 하나 근래에 와서는 부의 서쪽 성산 부근에서 옛 기와 몇 조각을 얻었으며 또 무너진 성터에서 생김새가 둥근달 같고 28수로 고리모양으로 만든 가운데에 ‘명주성(溟州城)’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로 보아 성산이 명주성이 있었던 곳이 확실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성은 산기슭을 감싸 안은 형태인데 서북은 높고 동남이 낮았다. 성 둘레는 지금 강릉부의 성과 이어지면서 뻗어 서로 비등하고 가운데에 상동·하동이라는 마을이 있으니 지금 이르기를 상장안, 하장안이라고 한다. ‘장안(長安)’이란 지명은 명주군왕 김주원이 여기를 도읍으로 정하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기록들은 대체로 명주성과 김주원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다. 이후의 상황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명주성의 정확한 변천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삼국이 경쟁하던 시기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역으로서 신라의 성으로 사용되었으며, 신라말기 김주원의 명주군왕성의 시기를 거쳐 고려초기까지 명주 호족세력의 근거가 되는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명주성의 위치가 등장하고 있으며 강릉읍성과 비등하다고 말한 것을 보아 고려, 조선시대에 비록 명주성이 읍치로의 기능은 소멸되었으나 읍성과 관련하여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보인다.
명주성은 성산면 금산리 장안동 북쪽 구릉을 정점으로 그 남동 방향의 골짜기를 둘러싸는 토석혼축성이다. 골짜기의 고도는 해발 100m 미만의 낮은 지역이지만 그 입구가 좁고 성벽의 바깥부분은 대부분 급사면을 이루고 있다. 남동쪽 방향에는 남대천 북변 충적지가 북동에서 남서로 발달되어 있다. 성벽은 서남벽이 토석혼축으로 나타나고 북벽의 일부는 토축으로 이루어져 있고 곡지의 동벽일부는 석축으로 되어 있다. 북서벽은 많은 부분이 무너져 내렸으며 성벽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변성암과 화강암으로 축조되었고 그 위에 얇은 토층이 덮여 있다. 성벽의 높이는 외측 3~5m, 내측 1~1.5m, 폭은 기저부 5~6m, 상부 1~2m, 전체 둘레는 약 1㎞ 정도이다. 성내에는 여러 개의 건물터가 있으며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자기파편과 많은 기와조각이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신라말기에서 고려초기에 이르는 동안 명주성이 한 시대의 관아 유적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강릉읍성-
강릉읍성은 고려시대 강릉부가 있었던 읍치소에 축조된 성곽이다. 남서쪽으로 성산면 어흘리의 대관령, 보광리 그리고 왕산면 목계리 남쪽 두리봉과 대화실산에서 발원한 남대천이 흐르고 있다. 구산에서 시내로 흘러온 물은 남쪽에 제비리·회산동·내곡동·노암동·입암동·두산동, 북쪽에는 금산리·홍제동·남문동·성남동·옥천동·포남동·송정동을 지나 동해로 흘러들어간다. 북으로는 화부산에서 서쪽으로 고개가 병풍처럼 이어지고 있으며 동쪽은 평야지대가 이어지고 바다와 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남대천 북쪽 읍성이 위치했던 지역은 해발 표고 70m 미만의 낮은 평지이다. 성내의 지형은 대체로 북쪽이 남쪽보다 높으며, 동쪽보다 서쪽이 높은 형상을 하고 있다.
현재 강릉읍성은 시가지로 변해서 옛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10년대 말 처음으로 제작된 지적도면상에 강릉읍성은 남북으로 마름모꼴로 나타나는데 구 강릉시청사와 임영관지가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측은 현 농협용강지소[임영로 155[용강동 36-8번지]], 남측은 명주초등학교 앞 삼거리[명주동 63-5번지], 동측은 현 강릉농협 건너 동보성 앞[성내동 12-3번지], 서측은 강릉여자중학교 서북편[용강동 46-6번지]이다. 강릉읍성의 성체는 이 네 곳을 연결하여 정남북으로 마름모꼴 형상이었다고 추정된다.
현재 성벽의 흔적으로 짐작되는 곳은 읍성의 동북벽에 해당하는 천주교 임당성당 동쪽에 15m 가량이 남아 있을 뿐이다. 1970년대까지는 남벽, 서벽의 일부가 명주초등학교와 강릉여자중학교 근처에서 확인되었으며 당시에 높이 1.8m, 길이 150m의 성의 석축이 남아 있었음을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은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모두 콘크리트 담벽으로 바뀌어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경강로2018번길 5-1[남문동 131-4번지] 민가의 담장 하부에 사용된 석재 일부는 당시 읍성의 성벽에 사용된 석재로 보인다.
강릉읍성에 대하여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국여지지』, 『대동지지』, 『관동읍지』, 『임영지(臨瀛志)』, 『강릉군지』,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강원도지』 등 대부분의 지리지 기록은 읍성의 규모와 읍성 내 연못, 우물, 관아 시설들에 대한 현황, 또는 관아 시설의 개보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각 지리지가 앞선 기록을 그대로 기록하여 같은 경우도 있고, 조금씩 차이를 보이기도 하는데, 시대에 따라 증개수하면서 토성이 석축으로 바뀌며 석축의 길이가 길어졌고 이를 둘레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세종 때 토성 784보는 환산하면 약 1,469m인데, 중종 때 석축 둘레가 3,782척으로 1,181m인 실제 규모와 다르다. 당시 서북벽은 축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규모를 일관되게 기록한 것이다. 1975년 간행된 『임영강릉명주지』를 만들 때에도 현장 조사 없이 당시의 정확한 상황을 기록하지 못하고 앞선 지리지와 같은 정도의 내용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강릉읍성과 관련한 직접적인 기록으로,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선조 24)경 부사 서득운이 성을 더 축조한 사실이 처음 보인다. 이때까지 강릉읍성은 군사적 목적보다 행정적 목적으로 활용되어왔던 것이다. 임진왜란 직전에 성을 더 축조한 것은 실질적으로 전쟁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지라도 강릉 사회가 전쟁에 미리 대비하고자 하는 의도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강릉읍성에 관한 주요 기사는 읍성의 동문과 남문의 중·개수에 대한 것이 잦고, 1630년(인조 8)경 부사 민응형부터 1800년(순조 즉위년) 조흥진까지 여러 명의 부사들이 사문 조성, 성첩 보수, 여장 신축, 서북문 근처에 연정 건립, 군사 2천 명을 모집하여 다시 쌓은 일, 동문에 금종을 다시 만든 일 등이 기록에 남아 있다.
『관동읍지』의 기록에 따라 성내에 있었던 관부의 시설물을 살펴보면, 1788년경 읍성에는 남문[어풍루 6칸], 동문[가해루 6칸], 내아[17칸]와 부속 건물[익랑 16칸, 행랑 17칸], 객사[임영관 9칸, 동대청 13칸, 서헌 6칸, 중대청 12칸, 즉청방 6칸, 월랑 31칸, 삼문 6칸], 의운루[6칸], 사대[9칸], 부사[12칸], 작청[18칸], 군기청[16칸], 노방[8칸], 부창[32칸] 등의 공공시설이 성내를 채우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옛 읍성지에는 지정문화재로 국보 제51호인 강릉객사문과 사적 제388호인 임영관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인 칠사당이 있다. 강릉읍성의 자리에는 방송국, 기상청, 한국은행, 농협, 강릉여자중학교 등의 공공 기관 단체의 건물을 비롯하여 읍성이었던 영역이 전부 시가지로 변했다. 임영관지 객사문이 최근 해체 보수 공사를 마무리하였으며, 임영관은 중대청이 복원되었고 전대청과 동서 익랑이 복원되었다.
강릉읍성은 고대의 예국고성, 명주성, 조선시대의 강릉읍성의 과정을 거쳐 변천해 왔다. 특이한 점은, 가장 이른 시기의 예국고성이 강릉읍성보다 규모면에서 훨씬 넓고 크다는 것이다. 예국고성이 더 낮은 평지 지역에 위치하고 성내에 주민 거주지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의 강릉읍성은 읍성 내에 주민 거주지라기보다는 관아에 딸린 관속들의 주거와 관아 시설들만 배치되었으므로 규모가 축소되었다고 생각된다. 예국고성이 방어 성격을 띠고 넓은 성곽 내에 주민들을 수용하였던 데 비하여 강릉읍성은 행정적 성격이 강화되고 관아 중심의 읍성으로 변화된 것이다. 강릉읍성이 형성되어 있던 당시의 주민 거주지는 읍성 가까운 곳에 일부 밀집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농토를 따라 분산되어 있었다.
강릉읍성은 936년(태조 19) 객사인 임영관이 창건된 이후, 이 지역에 관아들이 배치되기 시작하는 시기에 이르러 관아와 부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축성되었으나 그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936년 ‘임영관’이라는 객사가 창건된 사실, 992년(성종 11) 명주가 목(牧)으로 읍격이 변경된 사실, 그리고 1029년(현종 20) 이후 여진이나 왜구 출몰 등으로 객사와 관아를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읍성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조선조인 1451년(문종 1) 3,720척 규모로 증·개축되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강릉읍성은 선초 이전에 이미 축성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60년 후인 1512년(중종 7) 읍성은 2,782척 규모의 석축성으로 개축되었다.
따라서 강릉읍성은 나말여초부터 객관의 방비를 위한 소규모 토성으로 유지되어 오다가 고려중기 이후부터 발생한 변란으로 인해 그 규모가 점차 확대되었으며, 조선초기에 이르러 객사와 관아 그리고 기타 관아 시설물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한 전형적인 읍성의 모습을 갖추었다. 특히, 1725년 강릉읍성이 수축될 때, 기사에 의하면, 수축의 목적이 홍수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이색적이다. 홍수대비라는 목적은 강릉읍성의 남쪽이 남대천과 연접해 있었기에 별도의 제방을 축조하기 보다는 읍성의 서문과 남문 사이 성벽을 증축하여 읍성 내 관아와 부민들을 보호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강릉 관아 건물들이 언제부터 지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임영지』에 전하는 기록만으로 보면, 1586~1588년 사이 강릉부사 홍인헌(洪仁憲)이 아(衙)와 진무소를 지었고, 1595~1600년 사이 강릉부사 신경진(辛慶晋)이 관청을 조성하였다는 기사가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에 이 기록만으로 16세기 후반 경부터 강릉 관아가 건립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미 강릉 동헌을 주제로 한 한시가 고려 공민왕 때 인물인 권사복(權思復)에 의해 지어진 사례가 있는 것으로 보아 훨씬 이른 시기에 관아는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강릉부사 신경진이 관청을 조성하였다는 기사는 아마도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관아를 전쟁 소강 상태인 시기에 다시 조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강릉읍성 내 공해는 크게 접빈객, 망궐례와 같은 의례를 행하던 객사, 수령의 집무 공간이 이른바 동헌인 외아와 수령 권속들의 거주 공간인 내아를 합친 아사가 있으며, 그리고 창고, 호장, 향리, 좌수, 군관, 그리고 사령이나 관노비들의 기거 및 잡무 공간인 기타 관아 등이 있었다. 강릉대도호부 관아도 현존하는 기록으로 보면, 조선전기와 후기 관청 건물들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 연유는 시세에 따른 행정기능과 수요의 변화, 그리고 화재나 전란과 같은 재난에 따른 관아의 소실로 인한 복구 등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조 강릉대도호부 관아는 대체로 내아와 부속건물, 외아, 그리고 기타 관아로 구분된다. 내아는 수령의 내실로 주로 수령의 권속들이 기거하였으며, 익랑은 사랑채이고, 행랑은 수령의 권속들이나 권속을 돕는 노비들의 주거 공간이다. 외아는 1725~1727년 경 강릉부사 김정이 지은 칠사당이 대표적인 건물이다. 이 칠사당은 수령이 시사 기능을 수행하던 공간으로 중요 집무공간이면서 관아의 대표성을 갖는 핵심 건축물이다. 특히 강릉대도호부 칠사당에는 칠사지목(七事之目)을 각자하여 특별히 교유하는 말로 삼고 아침저녁으로 출입할 때 그 밝은 명(命)을 생각하도록 할 정도로 중요한 공간이었다.
『임영지』에는 1669~1671년 사이 강릉부사 여민제(閭閔齊)가 건물을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1725~1727년 사이 강릉부사 김정이 수각을 짓고 종(鐘)을 만들었으며, 칠사당을 창건하였으며, 연당을 파고 수각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다소 혼란한 점이 있다. 그러나 『입재선생유고(立齋先生遺稿)』 권13에 수록되어 있는 「명주칠사당기」에 따르면, "주에 옛날 시사청이 있었는데, 낮고 허물어져 공이 매죽헌(梅竹軒)을 철거하고 그 재목으로 수각을 지었으며, 그 터에 16칸 집을 짓고 시사청으로 삼아 헌(軒)을 이름하여 ‘찰미(察眉)’라 하고, 당을 ‘칠사’라 하였으며, 헌은 정(情)을 논하고 당은 일을 논하는 곳이라 하고서, 그 위에 칠사지목(七事之目)을 각자하여 특별히 교유하는 말로 삼고 아침저녁으로 출입할 때 그 밝은 명을 생각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여민제가 중수한 것은 매죽헌이며, 김정은 매죽헌을 철거하고 그 재목으로 수각을 지었으며, 매죽헌 터에 별도로 16칸 규모의 칠사당을 건립하고 ‘찰미헌’과 ‘칠사당’이라 명명한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칠사당’이란 명칭의 건물이 지어진 것은 1725년경이며, 기능적인 면에서 철거된 매죽헌과 신축된 칠사당은 동일 기능을 수행하는 시사청이라 할 수 있다.
또 외아의 건물배치 구조는 중앙에 당을 두고 그 앞에는 전랑을 좌우에 둔 외아 내 대문이 있었으며, 대문 밖으로는 각 부속 관아로 연결되는 통로와 함께 외아 외삼문이 있어, 먼저 외삼문을 통과하여야만 외아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객사인 임영관을 포함한 강릉대도호부 관아의 주요 건축물들은 중 관아의 핵심건물인 외아는 서쪽, 내아는 동쪽에 배치하였고, 객관은 관아 뒤편에 있었다. 또 향청, 작청, 관청, 군기고, 장관청 등은 내아 전면의 담을 사이에 두고 약간 거리가 떨어 진 남서쪽과 동남쪽에 주로 배치되었으며, 대동청, 고마청 등은 내아와 떨어진 동쪽에 배치되었다. 기타 관아 건물들은 주로 읍성 내 내아와 외아와는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향청은 좌수·별감 등이 부민들이 제기한 각종 소장을 처리하거나 지방 풍속의 조정과 향리의 규찰을 담당하는 곳으로 고을 관아에 버금간다 하여 이아(貳衙)라고도 하였다. 작청은 길청이라고도 하였는데, 직임을 나누어 맡았던 아전들이 수령을 보좌하여 민사를 관장하던 곳이다. 부사는 호장의 집무 공간이었다. 이 밖의 관아 부속 건물로는 읍성의 네 문루를 비롯한 누각, 사대, 형옥, 성황당, 빙고, 책실 등이 있었으며, 건물 외에 시설로는 연못이나 우물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평시에는 음용과 경관 조명을 위해 이용되었으나, 설치의 근본 목적은 화재 발생에 대비하고자 함이었다.
따라서 강릉대도호부 관아 건물들은 외아인 칠사당을 정점으로 왼쪽으로는 내아가 배치되었으며, 또 외아와 내아는 담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직접 연결된 통로가 있었으므로 수령과 권속들이 왕래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외아는 내삼문과 외삼문을 두어 관아의 엄격성을 강조하였으며, 기타 관아들은 대체로 외아 외삼문 바깥 지역에 독립된 건물에 담장을 친 형태로 배치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조 강릉대도호부 읍성 내 관아들은 대체로 관아 쓰임새에 따라 담장 또는 대문으로 각각 분리된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으므로 각 관아의 기능과 업무에 대한 고유성을 강조하는 형태로 조성·배치하였던 것이 특징이다.
강릉관아는 1800년대 말까지 온전한 모습으로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지나 현대적인 도시가 발달하면서 급속히 파괴되어 현재 객사문과 칠사당만 남아 있었다. 일제강점기 칠사당은 일본헌병분대가 주재하였으며, 때로는 군수 관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내아는 학교조합 사무소, 향청은 측후소, 장관청(將官廳)은 우체국장 관사, 군기청(軍器廳)은 소학교로도 사용되다가 1930년경 군청 부속 건물로 이용되었다. 작청(作廳)은 한때 강릉군청 건물로 사용하다가 명주조합으로 사용하였고, 부사(府司)는 우편국으로 쓰였으며, 사령방(使令房)과 관노방(官奴房)은 경찰관원의 관사로 사용되었다.
강릉 지역에서 전통적인 공간구성이 해체되기 시작한 시기는 대체로 1920년대부터이다. 『증수임영지』[1933년 간행]나 1933년 경 강릉읍성과 관련된 지도에 의하면, 기존 관아들이 해체되지 않고 그대로 존속되었다. 즉 활용 가능한 공간에 공공기관을 배치하여 활용[측후소, 보통학교, 경찰서 등]하는 한편, 강릉군청이나 강릉면[읍] 사무소와 같은 건물은 관아 핵심[칠사당, 객사, 임영관 등] 지역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신축하였다. 그러나 1920~1930년대부터 일부 관공서 건물이 신축되면서 전통적인 관아 건물들은 점차 사라지고 외관상 일본 양식을 뛰는 건물들이 지어지다가 1930년대 이후부터는 콘크리트 구조의 신축건물들이 지어졌다.
1955년 칠사당 동쪽에 강릉시청사가 신축되어 사용되다가 2001년 12월 17일, 강릉시청사가 경강로 2045[명주동 38-1번지] 옛 관아터에서 강릉대로 33[홍제동 1001번지]로 새로이 이전, 개청하였다. 새로운 강릉시청사가 건축된 후 원래의 건물을 철거하고 관아지에 대한 발굴과정을 거쳐 건물지를 확인한 후 본격적인 조선시대 강릉 관아 복원 사업을 펼쳐 현재의 강릉대도호부 관아를 조성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