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2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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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澤徵 |
영어음역 | Yi Taekjing |
이칭/별칭 | 경민(景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호 |
[정의]
조선 후기 강릉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간성(杆城). 자는 경민(景民). 아버지는 이흥상(李興商)이며, 조부(祖父)는 이만번(李晩蕃)이고 증조부는 이배근(李培根), 외조부는 신기(辛耆)이다.
[생애]
1738년(영조 14) 24세의 나이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과거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다. 1745년(영조 21)에 사헌부장령을 거쳐 1750년(영조 26)에는 북청부사(北靑府使)를 지냈다. 이어 사간원정언·광주경력(廣州經歷)·사헌부장령을 거쳐 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 등을 지냈다.
1782년(정조 6) 차대(次對)에서 올린 15조항의 계문(啓聞)을 임금이 가상히 여겨 첨지중추부사로 발탁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임금에게 올린 상소가 발단이 되어 역적으로 몰려 극형에 처해졌다. 그 후 1802년(순조 2)에 신원(伸寃)되어 복관(復官)되었다.
[활동사항]
1782년 공조참의로 있으면서 국정의 중요한 일을 규장각(奎章閣)의 신하를 중심으로 처리하는 것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것에 대해 대신들로부터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게다가 전 지평(持平) 이유백(李有白)이 그를 옹호하는 상소에서 중전의 가문인 청풍김씨(淸風金氏)를 비판한 일이 문제가 되어 임금의 친국(親鞫)을 받았다.
결국 이 일로 같은 해 7월 22일에 이유백 등과 함께 역적으로 몰려 극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이택징의 고향이 강릉이라 하여 강원도를 원춘도(原春道)로 명칭을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