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5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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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佑明 |
영어공식명칭 | Kim Woomyeong |
이칭/별칭 | 이정(以定),충익(忠翼),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근하 |
출생 시기/일시 | 1619년 - 김우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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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42년 - 김우명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652년 - 김우명 공조 좌랑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61년 - 김우명 오위도총관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75년 - 김우명 사망 |
출생지 | 김우명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
부임|활동지 | 부평도호부 - 인천광역시 계양구 |
묘소|단소 | 김우명 묘 - 강원도 춘천시 서면 안보리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청풍 |
대표 관직 | 영돈령부사 |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가평 지역 출신 문신.
[가계]
김우명(金佑明)[1619~1675]의 본관은 청풍(淸風)이고, 자는 이정(以定)이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군자감 판관 김비(金棐)이고, 할아버지는 참봉 김흥우(金興宇)이다. 아버지는 잠곡(潛谷) 김육(金堉)이며, 형은 영의정을 역임한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김좌명(金佐明)이다. 딸은 조선 18대 국왕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이다.
[활동 사항]
김우명은 지금의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에서 태어났다. 1642년(인조 20)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49년(인조 27)에 강릉참봉에 임명된 이후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 등을 역임하였다. 1651년(효종 2) 딸이 책명을 받아 세자빈이 되었다. 1652년(효종 3)에 공조 좌랑에 임명된 이후 평시서(平市署) 영(令), 공조 정랑,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 부평부사(富平府使), 사재감(司宰監) 첨정, 군기시(軍器寺) 부정(副正), 예빈시(禮賓寺) 정(正), 제용감(濟用監) 정(正)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국구(國舅)[임금의 장인]로서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져야 하였지만, 아버지인 김육의 상을 당해 봉작을 받지 않았다. 2년 뒤인 1661년(현종 2) 봉작을 받은 뒤,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고 이어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과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직하였다. 송시열(宋時烈)[1607~1689]과 같은 서인이었으나 민신(閔愼)의 대부복상문제(代父服喪問題)[실성한 아버지 대신 손자가 상주가 된 것에 대한 문제]와 국릉(國陵)에 표석(表石)을 세우는 문제에서 송시열이 산림으로서 지나치게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김우명은 남인인 허적(許積)에 동조하였다. 이후 아버지 김육의 뒤를 이어 왕실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한당(漢黨)의 중진이 되었다.
숙종 초에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 형제가 궁중에 드나들면서 궁녀들을 괴롭힌 사실이 있었는데, 김우명은 “이 문제를 말하지 않으면 화가 장차 미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결국 1675년(숙종 1)에 상소를 올려 이정·이남 형제의 죄명을 밝히고 처벌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정과 이남이 남인이었던 윤휴(尹鑴)를 부추겨 김우명을 위협하였다. 이 일로 인해 병을 얻고 난 뒤 벼슬을 그만두고 두문불출하다가 1675년(숙종 1) 6월에 사망하였다. 김우명이 죽자 왕실에서는 왕실용 장례 기구들을 보내주고 각종 절차를 지원하였다. 1680년(숙종 6)에 숙종의 명령으로 시호를 내렸다.
[묘소]
김우명의 묘는 강원도 춘천시 서면 안보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