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589
한자 柳夢寅
영어공식명칭 Yu Mongin
이칭/별칭 응문(應文),어우당(於于堂),간재(艮齋),묵호자(默好子),의정(義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근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9년연표보기 - 유몽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2년 - 유몽인 진사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589년 - 유몽인 증광시 장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유몽인 세자시강원 사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유몽인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파견
활동 시기/일시 1603년 - 유몽인 경기도암행어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8년 - 유몽인 도승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9년 - 유몽인 성절사 겸 사은사로 명나라에 파견
활동 시기/일시 1612년 - 유몽인 이조 참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22년 - 유몽인 『어우야담』 저술
몰년 시기/일시 1623년연표보기 - 유몽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94년 - 유몽인 이조 판서 추증
추모 시기/일시 1796년 - 유몽인 '의정'이란 시호 받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32년 - 유몽인의 후손들이 『어우집』 간행
거주|이주지 도봉산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산
부임|활동지 경기도 - 경기도
부임|활동지 황해도 - 황해도
부임|활동지 남원도호부 - 전라북도 남원시
부임|활동지 한성부 - 서울특별시
묘소|단소 유몽인 묘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운곡사 -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호동리 730
성격 문관
성별
본관 고흥
대표 관직 동지의금부사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묘가 있는 조선 시대 문신.

[가계]

유몽인(柳夢寅)[1559~1623]의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자는 응문(應文)이고, 호는 어우당(於于堂)·간재(艮齋)·묵호자(默好子)이다. 시호는 의정(義貞)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유의(柳依), 할아버지는 사간 유충관(柳忠寬),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유탱(柳樘)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 閔氏)로 참봉 민의(閔禕)의 딸이다. 부인은 고령 신씨(高靈 申氏)로 유학(幼學) 신식(申栻)의 딸이다. 형제로는 형 유몽사(柳夢獅), 유몽표(柳夢彪), 유몽웅(柳夢熊)이 있다. 자식으로는 홍문관 수찬을 지낸 유약(柳瀹)이 있다.

[활동 사항]

유몽인은 유년기에 성혼(成渾)[1535~1598]에게서 수학하였는데, 경박하다는 이유로 질책받고 쫓겨났다. 이때 파문당한 일로 훗날 유몽인은 성혼 사후에 스승을 모욕하는 글을 써 비난 받기도 하였다. 1582년(선조 15) 식년시에서 진사가 되었고, 1589년(선조 22) 증광시에서는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에 제수되었고, 이후 호조 정랑, 사헌부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평양으로 떠나는 선조를 호종하였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세자 광해군의 분조(分朝)[임진왜란 기간 중 임시로 세운 조정]에 참여하였으며, 세자시강원,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여러 직임을 맡았다. 또 글을 잘 써 외교 문서 작성에도 자주 참여하는 등 대명(對明) 외교에서도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삼사(三司)[조선 시대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합쳐 부르는 명칭]의 관원을 두루 역임하였다. 1603년(선조 36)에는 경기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이천부사(利川府使) 신응구(申應榘)의 비리를 밝혀내었다. 1603년(선조 36)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되었고, 이어 1605년(선조 38)에는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 이후 병조 참의,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608년(선조 41)에는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성절사 겸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은거하였다. 이후 왕이 부르자 다시 남원부사(南原府使)로 나갔다. 그 뒤 예조 참판, 한성부 좌윤(左尹), 사간원 대사간, 이조 참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지냈다.

1618년(광해군 10) 당시 집권 세력인 대북(大北)이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을 제기하였는데, 북인(北人)이지만 비교적 온건합 입장에 속하였던 유몽인은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유몽인은 연명으로 상소를 올린 뒤 사직하였고, 이후 시를 지어 당시 간신으로 지목받던 박승종(朴承宗)을 비난하여 체직되었다. 이후 광해군 대에는 도봉산 등에 은거하며 도성에 드나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몽인은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623년(인조 1) 7월에 광해군의 복위를 모의하였다는 모함을 받았다. 유몽인은 소식을 듣고 도망치다가 체포되었으며, 결국 아들 유약(柳瀹)과 함께 사형되었다. 또한 일가 친척이었던 유경종(柳慶宗), 유위(柳韡), 유흠(柳𢡮) 등도 화를 입었다.

[학문과 저술]

유몽인의 저서로는 야담을 집대성한 『어우야담(於于野談)』과 시문집 『어우집(於于集)』이 있다. 또한 전서·예서·해서·초서 등의 글씨에도 모두 뛰어났다.

[묘소]

유몽인의 묘는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유몽인은 사형에 처해지며 관작이 삭탈되었는데, 1794년(정조 18)에 정조가 직접 신원하고 이조판서에 추증하였다. 1796년(정조 20)에는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전라남도 고흥군 운곡사(雲谷祠), 전라북도 완주군 삼현사(三賢祠), 충청남도 천안시 청절사(淸節祠) 등에 배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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