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5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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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咸陽 吳氏 |
영어공식명칭 | Hamyang Oh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어윤동 |
입향 시기/일시 | 조선 초 - 함양 오씨, 오흥(吳興) 입향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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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 시기/일시 | 1453년 - 함양 오씨, 오중부(吳仲富) 입향 |
입향지 | 함양 오씨 거창 입향지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당동 |
입향지 | 함양 오씨 거창 입향지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대야리 |
세거|집성지 | 함양 오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당동 장군봉 아래 |
성씨 시조 | 오광휘(吳光輝) |
입향 시조 | 오흥(吳興)|오중부(吳仲富) |
[정의]
오광휘를 시조로 하고 오흥과 오중부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거창군의 세거 성씨.
[개설]
우리나라 오씨의 시조는 무혜공(武惠公) 오첨(吳瞻)으로 중국에서 귀화했는데, 중국의 남북조 시대인 500년에 혼란을 피해 무역선을 타고 전라남도 해남에 도착했다. 오첨은 병법으로 유명한 오기(吳起)의 45세손이다. 오첨의 19세손인 오광휘(吳光輝)가 함양 오씨(咸陽吳氏)의 득관조(得貫祖)로 1세인데, 고려의 명종 말년에서 고종 때까지 활동해 함양 부원군으로 봉해지면서 비롯되었다.
거창에 입향한 사람은 두 명인데, 5세 오흥(吳興)과 7세 오중부(吳仲富)이다. 입향조 오흥의 손자가 7세인 오상문(吳尙文)으로 학문이 빼어나 문과에 급제하였고, 그 외손자가 기묘 명현인 형사보(邢士保)이고 손녀사위가 문과에 급제한 이계종(李繼宗)이다.
[연원]
거창에 입향한 함양 오씨는 사인공파(舍人公派)와 가남재공파(伽南齋公派)이다.
사인공파는 5세 오흥이 거창에 입향하였다. 6세 오선량(吳善良)은 정5품 무관인 사직(司直)을 지냈고, 7세 오상문은 세종 때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종 때에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거쳐 정4품 사인(舍人)에 올라 선정을 베풀고 퇴임 후에는 훌륭한 스승으로 제자를 길렀다. 오상문의 아들 오현무(吳玄武)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현감을 지냈고, 손자인 오붕(吳鵬)도 생원시에 합격해 참봉이 되었으니 3대에 걸쳐 과거에 합격한 셈이다.
가남재공파는 7세인 오중부가 산청에서 가조면 당동에 입향했는데, 생원·진사 양과를 합격하여 현감을 역임하였다. 9세 오맹학(吳孟學)은 문과에 급제하여 안주목사를 역임했고, 13세 가남재(伽南齋) 오대인(吳大仁)은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으며 직장(直長)을 지냈다. 15세 오정민(吳貞敏)은 효우가 지극하고 빈민을 구휼했으며 공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21세인 오병권(吳秉權)은 문필이 뛰어나 문집을 남겼다.
[입향 경위]
5세 오흥은 함양에 살다가 거창에 와서 남하면의 아주(鵝洲)와 서곡(黍谷)[현 대야리]에 세거해 사인공파라 일컬으며, 7세 오중부는 1453년에 계유정난을 당하여 산청에서 거창군 가조면 당동으로 옮겨 세거해 가남재공파라 일컫는다.
[현황]
2000년의 통계에 따르면 거창에 거주하는 함양 오씨는 122가구 314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대표적인 집성촌은 가조면 당동으로 30가구가 잔류하고 있으며, 남하면의 아주는 한때는 많았으나 지금은 몇 집만 잔류하고 있다.
[관련 유적]
당사(堂祠)는 가조 사직단(社稷壇)이라고도 하며 당동에 있다. 삼한 시대부터 천신을 제사하던 소도(蘇塗)와 같은 곳이었다. 함양 오씨가 약 500여 년 전에 입향한 후로는 오씨 문중에서 주관한 유서 깊은 유적이다.
문수정(文秀亭)과 문양재(文陽齋)는 15세 오정민을 기려서 후손들이 1936년에 세웠다. 경내에 문양재 오공 사적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