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038 |
---|---|
한자 | 敎育 |
영어음역 | Gyoyuk |
영어의미역 | Education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고대부터 현대까지 경상북도 김천 지역의 교육.
[변천]
1. 전근대 시기[고려·조선 시대]
고려 시대 이전에 김천 지역에 존재하였던 교육 기관은 현재 문헌상으로 확인할 수 없다. 1123년(인종 4) 각 주(州)에 학(學)을 세워서 도(道)를 널리 가르치라는 조서를 내렸지만, 이 시기 김천 지역에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기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김천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교육 기관이 설립되어 학생들을 교육시킨 기록은 조선 시대부터 남아 있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 교육 기관으로는 향교, 서원, 서당이 있다.
김천 지역에 설립된 대표적 관학 기관인 향교로는 김산향교, 지례향교, 개령향교가 있었다. 김산향교[현 김천시 교동 437번지]는 중설(中設)로 학생 50명을 수용해서 훈도가 교육을 맡았으며 현 봉산면·어모면·대항면·조마면·감천면·구성면의 일부[전 과곡면]와 김천 시내를 관할하였다.
개령향교[개령면 동부리 408번지]는 소설(小設)로 현 농소면·남면·아포읍·개령면·감문면을 관할하였다. 개령향교는 영남만인소사건 시 안동 도산서원과 영주의 영주향교와 더불어 주도적 역할을 한 곳이다. 지례향교[지례면 교리 739번지]는 소설(小設)로 현 지례면·부항면·대덕면·증산면·구성면 일부[전 석현면]를 관할하였다.
향교는 18세기 이후 향교의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제 기능을 차츰 잃어 갔다. 1894년 갑오개혁의 시행으로 과거 제도의 폐지로 교육 기능이 상실되기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향사를 지내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김산향교는 1985년부터 현재까지 여름 방학을 이용해 예절·충효 사상·향토 교육·유적지 순례 등을 하고 있다.
김천 지역에 설립된 사학 기관인 서원으로는 일신서원, 덕림서원, 경양서원, 도동서원, 춘천서원, 섬계서원, 자동서원, 경렴서원, 원계서원, 하로서원 등이 있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모두 훼철되었다. 또 다른 사학 기관인 서당으로는 양사당, 봉암서당, 흥학당, 오봉서당, 송계서당, 의산서당, 미계서당, 남곡서당, 조천서당, 안산서당, 이현서당 등이 있었다.
2. 근대
1) 구한말
김천 지역에서 근대 교육이 확산되는 시기는 대한 제국 이후부터이다. 을사조약이후 ‘근대 교육=국권 회복’이라는 인식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군수, 계몽 단체 회원, 상인 세력, 교회, 사찰 등 다수 세력에 의해 학교가 설립되었다. 구한말 김천 지역에 세워진 학교로는 송천학교[1901], 양성학교[1902], 광흥학교[1906], 광동학교[1906], 창흥학교[1906], 보성학교[1906], 육영학교[1906], 일중소학교[1907], 양성학교[1907], 광흥학교[1908], 황성학교[1908], 직명학교[1908], 창성학교[1908], 광륜학교[1908], 영흥학교[1908], 기독 명성학교[1908], 개진학교[1908], 보명학교[1908], 달중학교[1909], 진창학교[1909], 진명학교[1909], 황남학숙[1909], 성의학교[1909], 영진학교[1910], 광기학교[1910] 등이다.
이 시기 야학도 근대 교육 기관으로 점차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야학은 사립 학교·서당 등과 달리 1913년까지 법률적인 제재를 전혀 받지 않았다. 통감부 설치 이래 일제는 보통 교육 보급을 구실로 식민 체제 기반을 구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시기 일제는 사립 학교령[1908년] 등을 공포하여 민족 교육을 억압하였다. 이에 사립 학교 설립 운동이 전반적으로 부진해졌다. 야학은 민지 계발과 문명사회 건설을 위핸 새로운 대안 중 하나였다.
2) 일제 강점기
일제는 조선 교육령, 사립 학교 규칙, 서당 규칙을 공포하여 민족 교육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사립 학교와 야학 등을 탄압·약화시켰다. 그와 더불어 1910년대 ‘6면 1교제’, 1920년대 ‘3면 1교제’, 1930년대 ‘1면 1교제’ 등 기만적인 공립 보통학교 설립 정책을 통해 우리 민족의 교육 열기를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일제 강점기 김천 지역에 설립된 공립 보통학교로는 지례공립보통학교, 개령공립보통학교, 김천공립보통학교, 봉계공립보통학교, 금오산공립보통학교, 과곡공립보통학교, 아천공립보통학교, 아포공립보통학교, 금릉공립보통학교, 대덕공립보통학교, 증산공립보통학교, 곡송공립보통학교, 위량공립보통학교, 부상공립보통학교, 농소공립보통학교, 감천공립보통학교, 조마공립보통학교, 직지공립보통학교, 부항공립보통학교, 임천공립보통학교, 대화정공립보통학교, 능치공립보통학교, 연화공립보통학교, 구성공립보통학교, 대신공립보통학교가 있다.
일제 강점기 일제는 우민화정책을 통해 우리 민족을 통치하려고 했기 때문에 중등 교육 기관 설립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 이에 일제 강점기 전 기간 중등 교육 기관이 설립되지 못한 지역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김천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중등 교육 기관이 많이 설립되었을 뿐 아니라 그 종류도 다양하다. 성의학원, 금릉학원, 김천고등보통학교, 김천공립고등여학교, 김천공립상업학교가 있었다. 그 외 유아 교육 기관으로는 금릉청년회가 설립하고 이정득이 경영한 금릉유치원이 있었다.
3. 현대
1945년 11월 미군정 학무국의 주도하에 교육계와 학계의 대표 100여 명으로 구성된 조선교육심의회가 발족되면서부터 새로운 교육 제도에 관한 심의를 진행하였다. 이 회의에서 학교 단계를 취학전 교육·초등 교육·중등 교육·고등 교육·특수 교육 등 5단계로,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전체의 교육 연한을 20년으로, 남녀공학·2학기 제도 실시·9월 및 3월 학기제 실시 등 현대 대한민국 교육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946년 11월부터는 의무 교육을 전면적으로 실시키로 결정하였다.
또한 1948년에 출벌한 제1공화국[1948~1960] 정부는 1949년 말 교육의 기회 균등과 초등 무상 의무 교육을 기본 원칙으로 하는 교육법을 제정 공포하여 새로운 학제를 마련하였다. 1950년 6월에는 민주주의 교육법의 공포로 인해 전국적으로 의무 교육이 시행되었다. 이에 전국적으로 학교 설립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렇지만 교사 신축과 학교 유지 문제 등으로 인해 학교 설립이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김천 지역의 아동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교육 기관이 양적으로 확산된 계기가 되었다. 1950년 당시 김천 지역의 교육 기관을 살펴보면 초등 교육 기관 56개교, 중등 교육 기관 6개교였다.
6·25 전쟁으로 인하여 학교 시설이 파괴되고 교육 재정이 빈약한 가운데서도 초등교육의 인구는 계속 증가하여 의무 교육이 실시된 지 10년도 안 된 1959년에 전국적으로 360만 명의 아동이 초등학교에 취학하여 96.4%의 취학률을 기록했다. 김천 지역에서도 적어도 1960년대 초반에 대부분 초등학생들이 초등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참고로 1968년 기준 초등 교육 기관은 61개교[김천시 7, 금릉군 54]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천 지역의 중등 교육 기관은 급증하였다. 1950년 6개교에서 1968년 기준 중학교 13개교[김천시 7, 금릉군 6], 고등학교 6개교[김천시 인문 고등학교 3, 실업 고등학교 3], 준 고등학교 2개교[김천시 고등 공민학교 1, 금릉군 고등 공민학교 1]로 급속히 증가하였다.
1950년대 의무 교육 완성 6개년 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됨에 따라 1960년대부터 우리 교육 정책의 기본 과제는 중등 교육 발전으로 전환되었다. 중등 이후의 교육에 대한 수요는 개인의 자아실현에 대한 요구 충족뿐 아니라 국가·사회의 인력 수요의 충족이라는 측면에서도 절실히 요청되었다. 이러한 요청들이 중등 교육 기관의 증설을 가져왔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밖에 고등기술교 1개교[김천시], 재건학교 2개교[금릉군], 유아원 1개교[김천시], 화교를 대상으로 하는 외국인 소학교 1개교[김천시]가 설립되어 있었다.
1970년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농촌 인구가 급감하였다. 이것은 학생 인구의 격감으로 이어져 1979년부터 김천 지역에서도 초등 교육 기관의 통폐합이 진행되었다. 1979년 부항면 안간초등학교 폐교를 필두로 하여 해마다 늘어나 1999년도 까지 27개 학교가 폐교되거나 분교로 전락하였다.
1999년 3월 김천의 초등 교육 기관으로 김천초등학교·김천중앙초등학교·김천서부초등학교·금릉초등학교·김천다수초등학교·김천모암초등학교·김천동부초등학교·김천양천초등학교·김천응명초등학교·김천신일초등학교·농소초등학교·봉곡초등학교·금오산초등학교·운곡초등학교·아포초등학교·대신초등학교·지동초등학교·개령초등학교·개령서부초등학교·곡송초등학교·위량초등학교·아천초등학교·능치초등학교·어모초등학교·봉계초등학교·태화초등학교·직지초등학교·대룡초등학교·감천초등학교·조마초등학교·대방초등학교·신안초등학교·구성초등학교·양각초등학교·방산초등학교·지례초등학교·부항초등학교·대덕초등학교·증산초등학교가 있었다.
당시 통·폐합된 김천의 초등 교육 기관으로 안간초등학교[1979], 대야초등학교[1983], 구례초등학교[1989], 대성초등학교[1992], 광덕초등학교[1993], 금평초등학교·마산초등학교·구곡초등학교·문의초등학교·남곡초등학교·장전초등학교·광천초등학교[1994], 신곡초등학교·가례초등학교·내감초등학교·연화초등학교·연명초등학교·감문초등학교[1995]·도명초등학교[1996], 유촌초등학교·부상초등학교[1997], 오봉초등학교[1999], 신기초등학교·신암초등학교·과곡초등학교·임천초등학교·방산초등학교 등이 있다.
즉 66개의 초등 교육 기관 중 거의 절반에 해당되는 27개교가 대부분 1990년대에 통·폐합 당했다. 반면 김천 시내에서는 신규 아파트를 중심으로 증가된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초등학교가 신설되었다. 그 대표적인 곳이 김천신일초등학교와 대곡동 아파트 단지 주변에 세워진 부곡초등학교이다.
반면 중등 교육 기관은 1960년대에 비해 학교 수가 증가하였다. 1999년 기준 중학교 18개교[농남중학교·아포중학교·개령중학교·감문중학교·어모중학교·구성중학교·지례중학교·부항중학교·대덕중학교·증산중학교·김천중학교·김천중앙중학교·성의중학교·문성중학교·석천중학교·김천여자중학교·한일여자중학교·성의여자중학교], 고등학교 9개교[김천고등학교·김천농공고등학교·김천중앙고등학교·성의종합고등학교·아포공업고등학교·김천상업고등학교·김천여자고등학교·성의여자종합고등학교·한일여자고등학교]로 1960년대에 비해 증가되었다.
1968년 중학교 무시험 입학 제도가 시행된 이후 초등학생의 중학교 진학률이 매년 급속히 증가하여 1968년의 56%에서 1979년에 96%에 도달하게 되었다. 무시험 입학 제도는 평준화와 수용 능력의 확충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천 지역에서도 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중등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다. 1999년 기준 18개 중학교 중 4개교[대덕중학교[1969]·한일여자중학교[1970]·부항중학교[1974]·구성중학교[1975], 19개 고등학교 중 3개교[한일여자고등학교[1972]·김천상업고등학교[1972]·아포공업고등학교[1973]가 신설되었다.
1970~80년대는 고등 교육의 개혁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시기이다. 제1차[1962~1965]·제2차[1966~1970]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크게 성공하여 획기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이러한 발전의 원동력이 1960년대까지 급팽창한 교육의 힘이라는 사실로 집약되자, 교육계에서는 물론 경제 분야에서 교육에 대한 장기계획을 요청하게 되었다. 지속적인 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하여 조속히 선진국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노동 인력의 질적 개선을 통한 생산성의 향상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육 발전 자체를 위하여 혹은 교육 정책의 개발이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와 같은 교육에 대한 요청에 부응하여 장기 종합 교육 계획[1972~1986]을 효시로 많은 장기와 단기의 교육 계획이 수립되었으며, 대학·방송통신대학·개방대학 등의 설립이 가속화되었다.
김천 지역에서도 1970년대에 2개의 대학이 설립되었다. 1972년 김천간호기술고등학교에서 승격한 김천간호전문학교[현 경북보건대학교], 1979년에 김천실업전문대학[현 김천대학교]가 설립되었다.
2010년 현재 김천 지역의 교육 기관 현황을 보면 초등학교 33개교, 중학교 15개교, 고등학교 10개교, 대학교 1개교, 대학 1개교, 기타 학교 2개교[미용예술학교 1개교·방송통신대학교 부설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사회 교육]
해방 후 사회 교육으로서 문맹자 퇴치를 실시하였다. 1946년 3월 통계에 의하면 10세 이상의 성인 문맹자가 김천시 군내에 6만 2823명에 달하였다. 당시 인구는 18만 614명으로 약 삼분의 일이 문맹자였다. 이는 김천시뿐 아니라 전국적 현상이었다. 이에 1946년에 문맹자 퇴치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시·군·면·리·동에는 성인교육회가 조직되었다. 김천도 성인교육회가 조직되었다. 이런 종적인 연락망을 구축을 통해 사업을 강력히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또한 교육회의 회장, 부회장 등 주요 요직을 공무원이 역임함에 따라 관민이 함께 국가적인 문맹 퇴치 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1949년 김천 지역 성인교육회 현황을 보면 김천시에서는 김천시 성인교육회[회장 유석영 시장·부회장 최종영 부시장], 금릉군에서는 농소면[회장 김종국], 남면[이상희], 아포면[권영도], 개령면[허옥], 감문면[육인수], 어모면[김경원], 봉산면[정환구], 대항면[한순득], 감천면[이우상], 조마면[이석주], 구성면[여영복], 지례면[백대승], 부항면[이?현], 대덕면[장석환], 증산면[최병선]에 면 단위 성인교육회가 조직되었다. 그 회원 수는 1만 7457명이었으며 연간 370만 9000원의 예산이 소요되었다.
성인교육회에서는 각 동의 마을마다 1개소 또는 수 개소씩의 ‘국민 개학(皆學) 강습소’를 개설하였다. 주로 강사진은 교직원·행정 공무원·고등공민학교 생도·자원하는 마을 주민 등이었다. 1949년 당시 김천시 개학 강습소 실태를 보면 강습소 수는 41개소, 강사 수 41명, 대상자 수 2,367명이었다.
문맹자 퇴치 5개년 계획 사업의 또 다른 방안으로 지방마다 공민학교를 설치 운영하였다. 초등학교에 부설하거나 공공건물 또는 유휴 건물을 이용하여 성년과[2년]와 소년과[3년]를 두고 정규 초등학교 교과 과정을 이수토록 하였다. 성적이 우수한 소년과 출신 학생들은 초등학교에 편입할 수도 있었다. 교본으로는 문교부가 편찬한 『공민독본』을 사용하였다. 1949년 당시 김천 지역 공민학교 실태를 보면 공민학교 수 16개, 학습 수 22개, 학생 수 1,195명, 교사 수 36명이었다. 공민학교에 다닐 수 없는 사람들은 강습소를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