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0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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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 |
영어음역 | Cheonjugyo |
영어의미역 | Roman Catholicism |
이칭/별칭 | 가톨릭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백원철 |
[정의]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교.
[개설]
한국의 천주교는 자생적으로 출발했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와 다르다. 즉 한국에서 천주교는 18세기 후반에 조선의 일부 학자들이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이를 읽고 연구하면서 처음 시작되었다. 특히 근기 지역의 남인계 학자들 중 일부가 천주교의 교리를 이해하고 이를 실천해 보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들 중 이승훈(李承薰)은 사신으로 가는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서 직접 세례를 받았으며 1784년 3월에 귀국하면서 많은 천주교 서적과 십자가 등을 가지고 와 이벽(李檗) 등에게 전하였다. 이어 정약용(丁若鏞) 형제, 권철신(權哲身) 형제 등에 의해 천주교가 널리 확산되었으며 1784년 말경에는 한국에 최초의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천주교가 왕권과 전통사상에 대한 도전이라고 인식한 조선 왕조에 의해 19세기 후반까지 혹독한 박해를 받게 되면서 수많은 순교자가 발생했으며 이후 공산 치하의 북한 지역과 6·25전쟁 시에도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 한국의 천주교는 꾸준히 교세가 확장되어 2009년 현재 본당이 1,534개소에 이르고, 신자 수는 500여만 명으로 총 인구의 거의 10%에 달하고 있다.
[변천]
1. 천주교 전래와 순교자 최여겸
고창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이 지역 최초의 순교자인 최여겸[마티아]에 의한 것으로 판단된다. 최여겸은 무장현 동음치면[현 고창군 공음면]의 양반가에서 1763년에 태어났으며 1788년 25세 때 ‘전라도의 사도’라고 불리는 유항검(柳恒儉)을 찾아가 교리를 배운 후 세례를 받았다.
이후 전라도 진산고을의 윤지충(尹持忠)을 찾아가서 배우고, 현 충청남도 한산 지역으로 장가를 들고 나서는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李存昌)을 만나 배우면서 신앙이 더욱 굳건해졌다. 이어 처가살이를 마치고 고향 무장에 돌아온 최여겸은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며 복음을 전하는데도 열성을 다하여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1801년[신유년] 정월에 박해가 시작되어 처가가 있는 한산으로 피신했으나 4월에 체포되어 한산에서 심한 고문을 당한데 이어 무장으로, 전주감영으로, 서울 형조로 압송되어 각각 심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십계명을 버릴 수 없고 죽음을 택하겠다”라고 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이에 형조에서는 같은 해 7월 13일[음] 해읍정법(該邑正法)[고향에서 법을 집행함]의 명을 내렸고 무장으로 이송된 후 7월 19일 개갑장터에서 참수형을 받아 3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최여겸이 입교시킨 신자는 28명이었다. 그 중 이름이 잘 알려진 신자만 해도 무장의 최수천[횡성에 유배], 최일한[전주에서 형벌로 사망], 흥덕의 김처당[청도에 유배], 영광의 이화백[영광에서 순교], 함평의 남중만[평산에 유배] 등이 있었을 정도로 ‘서남해안의 사도’라고 불릴 만 하였다. 최여겸은 현재 ‘순교자 124위와 최양업 신부 시복시성’ 대상자로 교황청에 청원되어 있는 상태이다.
2. 신유박해 이후~현재
신유박해 이후 1886년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까지 고창 지역의 천주교 활동에 관한 문헌 기록은 매우 적다. 박해 당시 대부분의 신자들이 피난하여 떠났거나 남아 있더라도 신앙생활을 실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로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심산궁곡을 찾아 들어가 교우촌을 형성하며 은밀히 신앙을 지켜가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었으나 고창 지역은 그렇게 깊은 곳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는 달리 신앙촌이 형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1882~1883년 사이에 신수동 등 세 곳에만 공소가 세워졌는데 신자들도 대부분 충청도에서 피신해 온 유랑민이었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뒤 일제 강점기 초기에 이르기까지 바내미공소 등 7개가 추가로 세워져 공소는 총 10여 개가 되었으며 신부들이 순회하면서 사목 활동을 펼쳐왔다. 그러나 이들 공소들은 토착민들이 만든 신앙 공동체가 아니었으므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고 성당이 세워지자 신앙생활을 하기 좋은 곳이나 생업에 종사하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나가게 되었다.
그 결과 고창 지역의 공소들은 거의 없어지고 신수동공소만이 오랫동안 존속되어 내려왔다. 신수동공소는 행정 구역은 고창읍 산정리에 속하나 실제로는 장성과 고창이 맞닿은 산 속에 자리 잡고 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장성과 고창의 신자들이 피난하여 들어와 교우촌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1948년 고창읍내에 공소가 세워지자 신수동에 있던 6~7가구의 신자들은 읍내의 공소에 다니게 되었다.
1948년 모양성 동문 밑에 세운 고창공소는 3칸 정도 되는 기와집 한 채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동혜원공소도 세워졌다. 이후 1961년 고창성당이 설립되면서 교세가 확장되기 시작했으며 이후로 1965년에 신광공소, 1969년에 안현공소, 1970년에 심원공소, 1985년에 해리공소, 1987년에 용반공소가 각각 설립되는 등 농어촌 지역 곳곳에 신앙의 공동체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현황]
2010년 기준으로 고창 지역에는 1개 본당에 2,000여 명의 신자가 활동하고 있다. 고창군이기는 하나 용반공소를 포함하여 성내면과 흥덕면 일부 지역은 1999년 줄포성당이 분리되면서 줄포성당 관할로 이관되었다. 천주교 복지 시설로 고창어린이집, 고창자활후견기관, 다솜의 집, 샛별유치원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최여겸 마티아 순교지인 개갑장터 지역을 천주교 순교 성지로 개발하기 위하여 고창군청과 긴밀히 협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