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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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東均 |
영어음역 | O Donggy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377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성미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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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377 |
성별 | 남 |
생년 | 1896년 9월 13일 |
몰년 | 1950년 10월 21일 |
[정의]
일제 강점기 고창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1896년 9월 13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377번지에서 오연문(吳然汶)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사촌형인 오의균(吳毅均)도 독립운동가이다.
[활동사항]
오동균은 어려서 사촌형 오의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전국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오동균은 김승옥(金升玉)과 함께 「독립선언문」과 「국민휘보(國民彙報)」, 「조선독립가(朝鮮獨立歌)」 등의 문서를 구입하여 이를 다량으로 등사한 후, 읍내 유지 및 학생들과 연락하여 고창읍 장날인 3월 19일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사전에 일본 경찰에게 누설되어 예정일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지 못하게 되자, 3월 21일 오전 11시, 1백여 명의 시위 군중을 모아 놓고 독립 만세 시위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역설한 후,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오동균 등은 도중에 일본 경찰의 제지를 받았지만 더욱 기세를 올려 고창군청으로 행진, 군수와 군청 직원들에게도 독립 만세 시위에 동참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다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결국 1919년 7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8년 4월 28일에는 항일 민족 운동 조직체로 일본 경찰에 의해 지목된 전라북도기자대회사건 때 부의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독립촉성회 고창지부 부회장으로 건국 준비에 참여하였고, 김성수(金性洙)와 백관수(白寬洙) 등을 도와 한민당 창당 일원으로 활약하였으나,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10월 21일 화산리에서 학살당했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