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8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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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化三 |
영어음역 | Yi Hwasam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성미 |
[정의]
개항기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흥덕 농민 봉기 지도자.
[활동사항]
이화삼은 젊은 시절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에 살면서, 농업 기술을 전수하고 농민 계몽 등을 위해 만들어진 계모임과 같은 상호 부조적인 농민 조직 영학당을 이끌고 있었다. 1898년 이화삼은 이웃 마을 송관오의 장례식에 갔다가 여러 사람으로부터 흥덕군수의 탐학에 군민의 원성이 높은 것을 알고, 이웃 외남당리 송민수(宋敏秀)를 찾아가 진정서[등장(等狀)]를 올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소극적인 항의에 대한 결과를 주민들이 잘 아는 터라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취하기로 하였다.
이후 이화삼은 최주백·안사유·서운익 등을 만나 1898년 12월 27일 거사를 치를 것을 모의하고, 송민수와 함께 북면 중남당리·외남당리·하남당리, 동면 산양리·관정리·생근리 등 5~6개 마을 사람 300여 명을 거느리고 읍내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정계술·박기수·채기엽 등이 선봉에 서서 내아를 부수고 잠자던 군수를 끌어내어 작청의 서방에 가두고는 군수의 인신을 빼앗은 뒤 만민공동회의 방식대로 군민들의 의견을 물어 군수를 내쫓았다.
사흘 뒤 광주(光州)에서 파견된 관군에 의해 농민 봉기는 진압되고, 이화삼과 관련 인물 등은 체포되었다. 이화삼이 붙잡힌 뒤 영학당에서는 1899년 5월 4일 흥덕군에서 호남공동대회(湖南共同大會)를 열고 이화삼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이화삼은 석방되지 않고 5월 27일 광주로 극비리에 이송되었다. 이후 이화삼은 태형 100대에 징역 종신형에 처해졌으나 은사령을 받고 15년형으로 감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