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8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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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石鎭 |
영어음역 | Go Seokjin |
이칭/별칭 | 정여(貞汝),수남(秀南)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정성미 |
성격 | 의병|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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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
성별 | 남 |
생년 | 1856년 1월 11일 |
몰년 | 1924년 12월 26일 |
본관 | 장흥 |
대표경력 | 독립의금부 참모총장 |
[정의]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고창 출신의 의병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정여(貞汝), 호는 수남(秀南)이다. 1856년 1월 11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고석진은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906년 최익현이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거를 일으킬 때 참모로서 최제학(崔濟學)·최학령(崔鶴齡)·이용길(李容吉) 등과 함께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군사를 모집하고 무기를 준비하였다. 최익현 의진은 그 해 6월 5일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진출하였으나, 6월 11일 전주와 남원에서 출동한 진위대 및 일본군에 포위되었다. 고석진은 최익현 등과 함께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이튿날 최익현·임병찬(林炳瓚) 등 13명과 함께 붙잡혀 전주 진위영(鎭衛營)으로 호송되었다. 고석진은 6월 18일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일본군 사령부에서 가혹한 심문을 받고 4개월간의 구류형을 선고받았다.
1910년 임병찬이 고종의 밀조(密詔)를 받고 다시 의병을 일으켰을 때 고석진은 참모관으로 활약했으며, 1912년 2월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참모총장의 중책을 맡아 동지 규합 및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조직을 만들고 1914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23일 전라북도 조직 확대 중 독립의군부의 정체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독립의군부는 와해되었다. 1919년 고석진은 전국 유림 대표 137명 중의 한 사람으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였으며, 이후 향리에 돌아와 교육 사업에 열중하며 학생들의 독립 사상을 고취시키는 데 열중하였다.
[상훈과 추모]
신림면 가평리 생가 가까운 곳에 있는 도동사에 최익현과 같이 배향되었으며, 도동사 내에 수공기념비(樹功紀念碑)가 세워져 있다. 197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