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전후까지만 하더라도 낙동강에는 소금배가 많이 다녔다. 소금배는 소금만 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요즘의 잡화상처럼 참빗이나 ‘구루무(크림, 화장품)’등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해평면 소재지의 잡화점을 이용하기보다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오르내리는 소금배를 더 많이 이용하였다. 당시는 주로 현물로 물물교환을 주로 하였는데, 동네 여성들은 소...
동제인 주산제사와는 달리 뒷개들 들머리 쪽의 해평김씨 재실이 있는 시중사(侍中祠)에 모신 석상에 대한 서낭제사가 있었다. 예전에 주민들은 석상을 모셔둔 이곳을 서낭당이라고 하여 특히 애 못 낳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정성을 드렸다. 이 석상을 서낭당으로 하여 모신 유래는 여전히 주민들 사이에 생생하게 전해져 오고 있다. 해평큰마와 해평들을 마주보고 있는 오상동(五相洞, 오늘...
『선산부읍지(善山府邑誌)』의 ‘인물 고려조’에는 김훤술을 “본관이 해평(해평인)이다. 태조(太祖)를 도와 공을 세워 지위가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시호(諡號)는 장렬공(莊烈公)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는 일찍이 마을 주민들이 성황사에 안치하여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그 흔적이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지금도 김훤술 석상은 마을 뒷개숲의 시중사(侍中祠)에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