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3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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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鵬 |
영어음역 | Jeong Bung |
이칭/별칭 | 운정(雲程),신당(新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용만 |
[정의]
조선시대 문신.
[가계]
본관은 해주.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 증조부는 정희언(鄭希彦)이고, 할아버지는 정유(鄭由), 아버지는 현감 정철견(鄭鐵堅)이다.
[활동사항]
1467년(세조 12)에 출생하여 1485년(성종 16) 진사시에 입격하고 1492년(성종 23)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정자·지평·정언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교리로 있으면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영덕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 후 교리로 복직되었다가 병을 핑계로 낙향하였다.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학문에 열중하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그의 도학은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말년에 청송부사로 있을 때 넓은 기량과 청렴한 성품으로 청백리로서 널리 이름을 날렸고, 선정을 베풀어 크게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
어느 날 오랜 친구인 좌의정 성희안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청송 고을에는 응당 잣과 꿀이 많을 터이니 조금만 나누어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보고 난 정붕이 즉석에서 답장을 보내기를 ‘잣은 높은 산 위에 있고 꿀은 백성 집 벌통 속에 있으니 내가 어찌 이것을 구할 수 있으리오(栢在高山絶頂上 蜜在民間蜂筒中 爲太守者 何而得之)’라 하였다.
답장을 받아본 성희안은 자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부끄럽고 후회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여 사과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말하기를 ‘내가 문묘의 위패를 절로 옮기는 꿈을 꾸었다’하며 해괴한 일이라고 탄식을 하였는데, 다음날 연산군이 성균관을 왕의 놀이터로 만들고 위패를 사찰로 옮겨 버렸다. 이에 사람들은 모두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학문과 사상]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중종반정 후 병을 핑계로 낙향하여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정붕의 도학은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퇴계 이황도 ‘정붕의 학문의 정수를 알려면 마땅히 신당의 「안상도(案上圖)」를 보라’ 하였고 또 ‘선산은 야은 길재의 절의가 있고 정붕의 도의가 있다’고 하였다. 금오서원(金烏書院)에서 향사(享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