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28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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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時調 |
영어음역 | Sijo |
이칭/별칭 | 단가(短歌),시여(詩餘),장단가(長短歌),신조(新調)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석배 |
[정의]
경상북도 구미 지역 출신 문인이 창작한 시조.
[개설]
시조는 고려 말엽에 발생하여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도 창작되고 애창되는 정형시로 국문학의 대표적인 장르의 하나이다. 시조는 무당의 노랫가락, 향가, 고려 가요 등에서 발생하였다는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향가에서 기원하여 고려 가요의 분장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시조의 초기는 단가(短歌)의 가곡이었으며, 조선 영조 때에는 시조의 창곡으로 불리어 오다가, 갑오경장 이후 신시(新詩)의 영향을 받아 시조 시로서의 본격적인 형태로 발전하였다.
시조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사용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문헌상으로는 영조 때의 시인인 신광수(申光洙)의 『석북집(石北集)』「관서악부(關西樂府)」 중에 “일반으로 시조의 장단을 배열한 것은 장안에서 온 이세춘(李世春)일세.”라고 한 구절에 보이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시조는 3장 45자 내외, 4보격(步格)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초장 3·4, 4·4/ 중장 3·4, 4·4/ 종장 3·5, 4·3이 기본형이다. 3·4조 또는 4·4조가 기본 음수율인데, 종장의 제1구는 3음절로 고정되며, 제2구는 반드시 5음절 이상이어야 하고, 나머지 구는 한두 음절의 가감이 허용된다. 이 같은 종장의 제약은 시조 형태의 정형(定型)과 아울러 평면성을 탈피하는 시적 생동감을 깃들게 한다.
기본형에 해당하는 시조를 평시조 또는 단형시조라고 하고, 종장 제1구를 제외한 어느 구절이나 하나만 길어진 것을 엇시조 또는 중형시조, 두 구절 이상이 길어진 것을 사설시조 또는 장형시조라고 부른다. 그리고 몇 편의 시조가 내용상 연결되어 흔히 같은 제목 아래 쓰여진 경우가 있는데, 이를 연시조라고 한다. 구미 지역 출신 인사들도 상당수의 시조를 창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전하고 있는 작품은 많지는 않지만 길재, 하위지, 고응척, 박운 등이 남긴 시조가 전하고 있다.
[작품]
1. 야은(冶隱) 길재(吉再)는 “오백년(五百年)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도라드니 / 산천(山川)은 의구(依舊)되 인걸(人傑)은 간 듸 업네 /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이런가 노라”하는 「회고가」를 지었다.
2.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는 “객산문편(客散門扁)고 풍철(風徹)코 월락(月落)헐고 졔 / 주옹(酒甕)을 다시 열고 싯구(詩句)를 흣부르니 / 아마도 소인득의처(小人得意處)는 이인가 하노라”는 유유자적하는 삶을 노래한 작품을 남겼다.
3. 시조집에 따라서는 “전원(田園)에 나믄 흥(興)을 전나귀에 모도 싯고 / 계산(溪山) 니근 길로 흥치며 도라와셔 / 아 금서(琴書)를 다스려라 나믄 를 보내리라”라는 시조를 하위지의 작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지만, 이것은 김천택의 작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4. 용암(龍巖) 박운(朴雲)은 끝까지 학문에 정진하려는 모습을 나타낸 「일모(日暮)」와 세파에 시달린 작자의 애환을 잘 표현한 「용암(龍岩)」3수를 『용암집(龍岩集)』에 남겼는데, 제1수는 “라 져물고 갈 기 머러셰라 / 천리만리(千里萬里)아 람 건마/ 가다 업더딘 가던 기 말니아”(「일모(日暮)」)이다.
5. 두곡(杜谷) 고응척(高應陟)은 『두곡집(杜谷集)』에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시조화한 25수와 「마자재가(馬子才歌)」를 번역한 「호호가(浩浩歌)」3수를 남겼다. 제3수 「명명덕곡(明明德曲)」인 “만물(萬物)을 삼겨두고 일월(日月) 업시 살리러냐 / 방촌신명(方寸神明)이 긔 아니 일월(日月)인가 / 진실로 학문(學問)곳 아니면 일월식(日月食)이 저프니라”에서는 학문만이 곧 명명덕을 하는 일임을 밝혔다.
사설시조 「호호가」는 은사로서 안빈낙도를 누리는 즐거움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제2수는 “천지만물(天地萬物)이 엇디야 삼긴게고 / 굴원(屈原)은 므싀 일로 멱라수(汨羅水)에 디며 이제(夷齊) 긔 므스 일 서산(西山)에 기굴물 짓고 성현(聖賢)의 은 절로 즐겨거 / 백성(百姓)이 거복니 내라 혈마 엇더료”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