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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은동마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270
한자 漁隱洞-
이칭/별칭 은동,어은동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어은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복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 전라북도 옥구군 어은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95년 1월 1일 - 전라북도 옥구군 옥구읍 어은리,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어은리로 통합
성격 전통 마을

[정의]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어은리에 있는 전통 마을.

[개설]

어은동마을은 밀양 박씨(朴氏)들이 약 400년 14대째 터를 잡고 살아오고 있는 군산 지역의 집성촌에서 유래한 전통 마을이다.

[명칭 유래]

어은동마을은 행정 구역상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어은리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명칭은 어은동마을이다. 오래 전부터 “은동” 또는 “어은동”이라고 불러왔으며 지금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은동”과 “어은동” 두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마을 주변을 감싸고 있는 지리적 형태가 포구에 고기잡이배가 마을에 스며들 듯 숨어들고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 “은동”과 “어은동”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고,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이라서 “은동”이나 “어은동”으로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형성 및 변천]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어은리 어은동마을은 옛 사자암 봉수대 터가 자리잡고 있는 영병산 기슭에 있다. 만경강 안쪽까지 깊이 뻗어 곶(串)을 이루는 영병산 줄기에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 어은동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는 이곳에 처음 정착했다는 밀양 박씨(朴氏)이다. 박씨(朴氏)들은 14대째 살고 있다.

박씨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조선 개국 이후이다. 고려 왕조의 멸망 이후 고려의 신하로서 간의공의 벼슬을 받은 관리가 이성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어은동마을 앞을 지나는 만경강 건너 김제에 낙향하였고 이후 현재의 어은동에 후손들이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이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오직 박씨들만 십여 가구가 살았고 영병산 줄기 아래 강물이 닿지 않는 곳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4년 이완용이 득세했을 때 정부 지원으로 쌓은 이른바 “이완용둑”으로 인해 현재의 선연리어은리 일대의 광활한 들판이 생겼다고 한다.

[자연 환경]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어은리 어은동마을은 조선 시대 사자암 봉수대 터가 있는 영병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북쪽으로 영병산이 길게 뻗어 있으며 마을 북서쪽으로 평야 지대가 펼쳐지고 마을 앞 남쪽으로 만경강 하류에 접하고 있다. 북쪽의 영병산을 병풍 삼아 마을 앞 만경강을 바라보고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과 마주하고 있다.

[현황]

고려 왕조의 멸망 이후 점차 형성되었다고 전해지는 전라북도 군산시 어은리 어은동마을은 밀양 박(朴)씨들의 집성촌으로 형성되어 현재까지 14대에 걸쳐 살고 있다. 1970년대 이전까지는 마을이 밀양 박씨들로 구성되어 집성촌의 성격이 짙었고 마을 전통 풍습이 계승되어 왔으나 1970년대 이후 다른 성씨도 이주해 살면서 집성촌이라는 의미가 상당 부분 퇴색되었다. 어은동 마을의 주업은 새만금 간척 사업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새만금 이전에는 마을 이름에 걸맞게 어업이 8할을 차지하였고 민어, 준치, 숭어, 복어, 조기, 대하, 소라, 개우렁, 대합 그리고 특히 전량 일본으로 수출된 노랑 조개가 많이 잡히기도 하였다고 한다. 새만금 방조제가 완공된 이후 어업에 종사하던 주민들도 마을을 떠나 현재 약 300여 명의 주민들이 농업을 위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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