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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554
한자 六二五戰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종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 - 북한군 남침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북한군|미군

[정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있었던 전쟁의 양상.

[역사적 배경]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으로 장장 3년 1개월의 동족 상잔 비극이 벌어졌던 6·25전쟁, 해방 후 5년 만에 일어난 참변은 민족 통일을 표방한 전쟁이었다. 60년이 넘도록 휴전이 지속하고 있으며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경과]

6·25전쟁 당시 군산에는 금강 유역에 미군 제 24사단 제 19연대와 제 34연대가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하였으나 탱크 5대와 연합군의 기갑 부대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미군은 대전 방면으로 후퇴하였고, 북한군은 공주를 거쳐 금강을 따라 군산을 함락시키고 전라북도·전라남도 일대를 장악한다.

[결과]

파죽지세로 천안을 점령한 북한군은 7월 초 2개 부대가 군산에 들어온다. 주력 부대는 배편이 가장 가까운 나포 나루를 건너 군산으로 진격하였고, 한 부대는 논산·강경을 거쳐 임피로 들어왔다. 북한군은 부대를 정비하여 대부분 전주 방면으로 진출하였고, 나머지 병력은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는 9월까지 약 2개월 동안 군산에 주둔하게 된다.

북한군이 공산주의 이념을 시민에게 주입하면서 주둔했던 2개월을 ‘인공 치하’[인민 공화국]라 하는데, 시민들은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을 불안에 떨면서 보내야 했다. 개인감정을 앞세운 인민 재판과 거듭되는 보복으로 세상이 바뀔 때마다 교도소, 경찰서 유치장, 마을의 공동 우물, 방공호, 산골짜기 등에서 온갖 방법의 학살이 자행됐기 때문이었다.

[의의와 평가]

6·25전쟁은 남북 쌍방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북한은 남한 보다 피해가 더 컸음에도 김일성 체제를 더욱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남한은 반공주의 분위기가 높아졌다. 반공이라는 이름 아래 부도덕한 권위주의가 합리화되는 모순된 경향마저 나타났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장기 집권 도구로 이용하는 권력자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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