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6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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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阿東里遺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 아동리 |
시대 | 선사/청동기,고대/초기 국가 시대 |
집필자 | 유영춘 |
현 소재지 | 아동리유적 -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 아동리 699-3 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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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유적 |
[정의]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 아동리 토석 채취장 개발부지 내에 자리한 청동기~초기 국가 시대 유적.
[개설]
군산 아동리·당북리 토석 채취장 개발 이전에 실시한 시·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이다. 발굴 조사 결과 청동기에서 초기 국가 시대에 이르는 유구가 자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아동리 유적에서 조사된 유구와 유물은 군산의 역사를 조명하는데 값진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건립 경위]
아동리유적의 건립 경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발굴 조사를 통해 유적의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위치]
아동리유적은 호덕 마을 회관에서 서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현재는 토석 채취장 개발이 완료되었다.
[형태]
남북으로 뻗은 능선의 정상부에서는 옹관묘·석관묘·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옹관묘는 토광에 45°가량 경사지게 안치되었는데 전형적인 송국리형 토기로 저부의 중앙에 하나의 구멍이 뚫려있다. 구경이 19.5㎝, 저경 12.2㎝, 최대동경 39㎝, 높이 55㎝이다.
석관묘는 1호 석관묘를 중심으로 반경 10m내외에 5기의 석관묘가 분포되어 있다. 이들은 토광을 파낸 다음 그 안에 판석(板石)을 서로 잇대어 벽석을 만든 장방형의 석관이다. 이중에서 잔존 상태가 양호한 1호 석관묘의 개석은 6매의 판석을 사용했는데 그 사이에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할석을 채워 메꾸었다. 풍화암 반층을 파내어 마련된 토광은 2단으로 북쪽과 서쪽이 일부 유실되었다. 벽석은 1단의 판석을 세우거나 눕혀서 마련하였는데 높이가 맞지 않는 부분은 1~3단으로 할석을 더 올렸으며 벽석사이의 빈 공간에는 할석으로 채웠다. 바닥에는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았다. 1호 석관묘는 길이 137㎝, 폭 34㎝, 깊이 46㎝이다.
1호 석관묘에서는 마제석검과 석촉이 각각 한 점씩 출토되었다. 마제석검은 북벽에 잇대어진 상태로 병부가 동쪽을 향하도록 놓여있었으며, 석촉은 일단병식으로 병부에 비해 신부(新部)가 길며, 신부의 단면이 마름모, 병부의 단면이 유선형이다.
초기 국가 시대 주거지 3기는 수혈식으로 1호가 먼저 조성된 후에 그 위에 2호가 후대에 축조되어 서로 중복 관계를 이룬다. 3기의 주거지 모두 평면 형태는 방형으로 추정된다. 1호는 북쪽이 상당부분 유실되었다. 내부의 서벽 중앙에서는 타원형 소토부가, 바닥에는 점토층이 확인되었다. 길이 218㎝, 너비 254㎝, 잔존깊이 17㎝이다. 2호는 벽구나 주공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남서쪽으로 치우친 바닥에서 원형의 소토부가 확인되었다. 바닥은 점성이 강한 점토를 바르고 불로 다짐하였다. 길이 342㎝, 너비 340㎝, 잔존 깊이 40㎝이다. 3호 북서벽에는 노지가 조사되었고 바닥은 생토 암반층을 다듬어 그대로 이용하였다. 길이 340㎝, 너비 320~434㎝, 잔존 깊이 30㎝내외이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초기 국가 시대 토기편이 주로 수습되었는데 특히 3호 주거지에서는 철겸편이 함께 출토되었다.
[현황]
아동리유적은 발굴 조사 이후에 토석 채취장으로 개발되었다. 발굴 조사를 통해 수습된 옹관은 현재 군산 대학교 박물관에 실물이 전시되어있으며, 1호 석관과 내부 출토 유물은 모형으로 복원되어 역시 군산 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의의와 평가]
유구가 온전하게 보존된 1호 석관묘에서 출토된 마제석검과 석촉은 군산 지역에서 처음 출토된 것으로 이 지역의 선사문화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초기 형식의 속성을 담고 있는 옹관묘는 베일 속에 가려진 군산 지역 청동기 시대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값진 자료이다. 더불어 3기의 초기 국가 시대 수혈 주거지는 동일 시기로 추측되는 주변의 조개더미, 유물 산포지와 함께 향후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초기 국가 시대 유적의 성격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