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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998
한자 崔致遠
이칭/별칭 홍운(弘雲),해운(海雲),해부(海夫),유선(儒仙),고운(孤雲)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김두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857년연표보기 - 최치원 출생
활동 시기/일시 868년 - 최치원 당 유학
활동 시기/일시 874년 - 최치원 당 빈공과 합격
활동 시기/일시 879년 - 최치원 토황소격문 작성
활동 시기/일시 885년 - 최치원 귀국
활동 시기/일시 894년 - 최치원 시무책 작성
추모 시기/일시 1120년 - 최치원 내시령에 추증
추모 시기/일시 1121년 - 최치원 문창후의 시호 추증
출생지 최치원 출생지 - 전라북도 군산시 내초도동
사당|배향지 최치원 배향지: 무성 서원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사당|배향지 최치원 배향지: 서악 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2길 23
사당|배향지 최치원 배향지: 백연 서원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백연리
사당|배향지 최치원 배향지: 옥산 서원 -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최치원 배향지: 염의 서원 - 전라북도 군산시 옥산면 염의서원길 156-9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최치원 배향지: 문창 서원 -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경주
대표 경력 아찬(阿飡)

[정의]

통일 신라 시대 군산 내초도동에서 출생했다는 전설이 있는 학자.

[가계]

최치원경주 최씨의 시조이다, 아버지는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 때에 숭복사(崇福寺) 창건에 참여했다고 전해지는 견일(肩逸)이다.

[활동 사항]

자(字)는 홍운(弘雲), 해운(海雲), 해부(海夫) 등이고, 호(號)는 유선(儒仙), 고운(孤雲) 등이다

최치원은 857년(신라 헌안왕 1)에 태어났는데, 군산시 내초도동에서 출생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최치원은 금빛이 나는 돼지(金豚)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내초도동에는 ‘금도시굴’ 내지는 ‘금도치 구녁’이라 불리는 굴이 아직도 있는데, ‘금도시굴’은 ‘금돈시굴(金豚始窟)’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금돈시굴’ 설화에 의해 옥구 지방에서는 경주 최씨를 ‘돼지 최씨’로 부르기도 한다.

48대 경문왕(景文王) 때인 868년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唐)나라로 유학을 떠나, 874년 예부 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2년 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낙양(洛陽) 등지를 떠돌면서 시 쓰는 데만 몰두하여 5수(首) 1권(卷)으로 된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100수 1권으로 된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30수 1권으로 된 『잡시부(雜詩賦)』 등의 시문집을 지었다

876년에는 선주(宣州) 율수현(溧水縣)[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 현위(縣尉)를 지냈으며, 이 무렵 1부(部) 5권으로 된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을 저술하였다.

최치원이 머물고 있을 당시 당(唐)은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 875년부터는 왕선지(王仙芝), 황소(黃巢) 등이 유민을 모아 산둥성[山東省], 허난성[河南省], 안후이성[安徽省] 등지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877년 겨울 관직에서 물러난 최치원은 양양(襄陽)에서 이위(李蔚)의 문객(門客)이 되었다가,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그리고 고변이 황소(黃巢)의 반군을 토벌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자, 고변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4년 동안 표(表)·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의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이 무렵 최치원이 쓴 글은 1만여 편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名文)으로 이름이 높았다. 최치원은 879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 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의 직위에 올랐으며, 포상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받았다. 그리고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다시 하사 받았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무르며 나은(羅隱) 등의 문인들과 친교를 맺으며 문명(文名)을 떨쳤다.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에도 『사륙집(四六集)』과 『계원필경(桂苑筆耕)』 등 최치원이 저술한 책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885년(헌강왕 11), 최치원은 당 희종(僖宗)의 조서를 가지고 신라로 귀국했으며, 헌강왕(憲康王)최치원을 당에 보내는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는 시독(侍讀) 겸 한림 학사(翰林學士) 수병부 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으로 등용하였다. 귀국한 이듬해에 왕의 명령으로 「대숭복사 비문(大崇福寺碑文)」 등을 썼고, 당나라에서 썼던 글들을 28권의 문집으로 정리하여 왕에게 바쳤다.

저술 가운데 『중산 복궤집』 등 8권은 전해지지 않으며, 『계원필경』 등 20권만 전해지고 있다. 886년 헌강왕이 죽은 뒤에는 외직(外職)으로 물러나 태산군(太山郡)[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천령군(天嶺郡)[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부성군(富城郡)[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893년에는 견당사(遣唐使)로 임명되었으나,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떠나지 못했다.

당시 신라는 지방에서 호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약화되었으며, 중앙 정부는 주(州)와 군(郡)에서 세금을 제대로 거두지 못해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889년에는 진성 여왕(眞聖女王)이 공부(貢賦)의 납부를 독촉하면서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조정의 힘은 수도인 서라벌 부근에만 한정될 정도로 정치적 위기가 심각하였다. 최치원은 894년 진성 여왕에게 10여 조의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하였고, 진성 여왕최치원을 6두품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阿飡)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최치원의 개혁은 중앙 귀족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진성 여왕이 물러나고 효공왕(孝恭王)이 즉위한 뒤, 최치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그리고 만년에는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 908년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쓸 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정확한 사망 날짜는 확인되지 않으며, 방랑하다가 죽었다거나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최치원은 경주의 남산(南山), 합천 매화산의 청량사(淸凉寺), 하동의 쌍계사(雙磎寺) 등을 즐겨 찾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부산의 해운대(海雲臺)라는 지명도 최치원의 자인 ‘해운’에서 비롯되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에 ‘계림황엽(鷄林黃葉) 곡령청송(鵠嶺靑松)’이라는 글을 왕건에 보내어 고려의 건국을 암암리에 도와준 공이 있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최치원은 개혁이 좌절된 뒤에 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은둔 생활로 삶을 마쳤다. 하지만 유교(儒敎) 정치 이념을 기반으로 골품제도라는 신분제의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던 최치원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최치원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최언위(崔彦撝), 최승로(崔承老) 등은 고려에서 유교 정치이념이 확립되는 데 기여했으며, 새로운 국가 체제와 사회 질서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때문에 최치원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태인(泰仁) 무성 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함양의 백연 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의 고운 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祭享)되는 등 유학자들에게 계속해서 숭앙되었다. 유교 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해 역사를 정리하여 삼국의 역사를 연표의 형식으로 정리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저술하기도 했다.

최치원은 유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신라의 고유 사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나아가 유교·불교·도교의 가르침을 하나로 통합해서 이해하려고 했다. 최치원은 ‘난랑(鸞郞)’이라는 화랑을 기리는 ‘난랑비서(鸞郞碑序)’라는 글에서 유교와 도교, 불교를 포용하고 조화시키는 ‘풍류도’를 한국 사상의 고유한 전통으로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최치원은 유교·불교·도교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지극한 도(道)에서는 하나로 통하므로 유교·불교·도교를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진감선사 비문(眞鑑禪師碑文)’에 잘 나타나 있다.

궁극적으로 최치원은 유(儒)·불(佛)·선(仙)의 가르침이 하나로 통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유학자이면서도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노장 사상(老莊思想)과 풍수 지리설(風水地理說) 등에도 상당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승려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불교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여기에는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석순응전(釋順應傳)』·『석이정전(釋利貞傳)』 등 화엄종(華嚴宗)과 관련된 것들도 있지만, 지증(智證)·낭혜(朗慧)·진감(眞鑑) 등 새로 등장한 선종(禪宗) 승려들에 관한 글들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지증대사 비문(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禪宗)의 역사를 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원측(圓測)과 태현(太賢)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유식학(唯識學)에 대해서도 깊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은 유교·불교·도교의 가르침을 모두 깊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치원이 지은 불교 관련 글이나 비문에서는 불교만이 아니라 유교와 도교의 경전이 폭넓게 인용되고 있다. 이는 최치원이 유(儒)·불(佛)·선(仙)의 3교(敎)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은 달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문학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보여 후대 사람에게 숭앙받았는데 『사시금체부』, 『오언칠언금체시』, 『잡시부』, 『사륙집(四六集)』 등의 시문집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이름만 남아 있지만. 『계원필경』과 『동문선(東文選)』에는 최치원이 쓴 시문(詩文)들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또한 ‘대숭복사비’, ‘진감 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 대사 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 국사 백월 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 등 이른바 ‘사산 비문(四山碑文)’과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도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은 대구(對句)로 이루어진 4·6 변려문(騈儷文)을 즐겨 썼으며, 문장이 평이하면서도 고아(高雅)한 품격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외에도 『제왕연대력』, 『중산복궤집』, 『석순응전』, 『부석존자전』, 『석이정전』 등의 저술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상훈과 추모]

1020년(현종 11)에 내시령에 추증하고, 다음 해에 문창후(文昌侯)에 추시(追諡)되어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최치원의 학문과 인격을 기리기 위해 서원이 많이 건립되었는데, 경주에 서악 서원, 태인에 무성 서원, 호서에 홍산 서원이 세워졌고, 군산 지역에서는 문창 서원, 염의 서원, 옥산 서원에 주벽으로 모시고 제향(祭享)을 드리고 있다.

최치원이 글을 읽었다고 전해지는 자천대(紫天臺)는 일제 강점기에 전라북도 군산시 옥서면 선연리 하제에서 옥구읍 상평리 옥구 향교 안으로 이건(移建)되었다. 『옥구 군지(沃溝郡誌)』[1924] 유현(遺賢) 조(條)에 최치원에 관한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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